집 안에 속속들이 늘어가는 친환경 제품들을 볼 때마다 흐뭇하다. 욕실엔 대나무 칫솔과 고체 치약, 생분해 치실, 클렌징 비누, 샴푸바 등이 자리 잡고 있고, 주방엔 수세미 열매로 만든 수세미와 사이잘삼 식물에서 추출한 섬유로 만든 수세미가 나란히 걸려있다. 하나는 어른용, 하나는 아기용이다. 새로 들인 계피향이 풍기는 설거지 비누는 냄새를 맡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거리기 일쑤다. 며칠에 한 번씩 낡은 냄비에 과탄산소다를 팍팍 뿌려 소창 행주를 삶는데, 새하얘진 행주를 볼 때마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속이 다 시원해진다. 일회용 돌돌이 대신 다회용 돌돌이를 매번 씻고 말려서 쓰고 휴지나 물티슈 대신 걸레를 생활화하고 있다. 엄마를 보고 자라는 우리 아기도 가끔 손수건을 들고 바닥에 걸레질하는 시늉을 하는데 그게 어찌나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집안은 이렇게 조금씩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돈되고 또 느리고 불편하게 흘러간다. 이 불편함은 처음엔 꽤나 큰 불편이었지만 조금씩 습관이 되며 어느새 내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습관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실수도 하고 가끔은 남편과 충돌하기도 한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갖는다는 건 참 매력적인 일임과 동시에 어려운 것이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는 것, 그것을 구매하는 방법이나 빈도, 또 막상 사용했을 때 실망하거나 만족하는 일까지 모두 그 여정 안에 포함되는 것이니 말이다. 특히나, 이것에 가치관이 투영되면 생각보다 일이 꽤 커지고 피곤해진다. 무엇이건 간에 선택의 허용 범위를 좁히며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딱 즐거운 그만큼의 고단함이다.
내가 구매하는 친환경 제품들 중 많은 것들이 택배 상자에 담겨 온다. 물론 그것들은 대게는 종이 완충제와 옥수수 충전제, 크래프트지, 생분해 비닐과 같은 지구에 덜 유해한 것들이다. 하지만, 조금 더 비싸고 찾기가 어려워 잦은 배송에 의지하기도 하며 약한 내구성에 금방 또 새 것을 들인다. 쌓이는 택배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나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한다고 말해도 될까. 내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나는 어떤 새로운 취향을 찾은 것에 신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남편이 나보다 쓰레기를 덜 생산하는 사람인 거 아닐까. 나 좀 모순적인 걸까.
얼마 전 너무 많은 플라스틱 사용에 죄책감을 느껴 비누에 입문하려 한다는 친구가 내게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쓰고 있는 비누 브랜드와 제품들을 알려주었는데, 그중 규조토로 만든 비누 받침의 비싼 가격에 친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누망을 사려다 역시나 너무 비싸 양파망을 써도 되냐고 묻는 친구를 말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양파망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친구의 말. 어떤 사람이 친환경을 하려다 통장 거덜 난다는 소릴 했다는 거다.
반은 공감, 반은 당황하는 마음을 숨기고 '소비를 줄이면서 해야 친환경이지.'라며 일침을 날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게 그렇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거였다. 그래 쉽지는 않지. 왠지 모르게 뜨끔했고 안타까웠고 씁쓸했다.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떠할까. 환경을 명분 삼아 더 많은 소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현관에 쌓인 택배 상자를 보면서 말이다. 이놈의 택배 상자는 줄 줄을 모르네.
새로운 삶의 방식에 발을 들였다는 이유로 나는 자꾸 오래 간직하고픈 정갈함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들이고 싶어 진다. 크게는 인테리어부터 작게는 소소한 소품들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 마음에도 안 드는, 촌스러운 저런 물건을 애초에 들였을까. 생각하며 후회하고 고민한다. 오래된 물건을 버리고 새 것을 들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단지 눈에 보이는 깔끔함이 친환경적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가끔은 나도 마음이 동해 눈에 차는 것을 들이기도, 들썩거리는 마음을 꾹꾹 눌러 있던 그대로 그냥 두기도 하며 지낸다.
적어도 명분이 본질을 앞지르지는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