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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Nov 17. 2018

바(Bar)의 데시벨



아무리 잘 차려놓은 공간도 그것을 흐트러트리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와 매너를 느낄 때면 그 공간을 조용히 빠져나오게 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공간을 완성하는 건 디자인도 연출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공간의 데시벨'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 공간이 얼마나 조용하고 시끌벅적한가에 따라 그곳에 머무는 경험과 기억, 감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공간 안에서의 데시벨을 내 마음대로 구분해보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이 가장 조용한 상태일 테고 그다음은 약간의 소리가 들리는 '백색소음', 조금씩 '웅성웅성' 소리가 들리면서 차츰 '시끌벅적'해지고, 귀를 막고 싶은 대혼란의 공간에선 '시장통'같다고 느낀다. 시장에서 시장통 같을 땐 그게 나름 정겨울 때도 있는데, 적당히 매너를 지켜주어야 할 법한 공간이 시장통 같을 땐 한 없이 그 공간이 싫어진다.


어느 공간에서나 비슷한 수준의 데시벨을 유지할 순 없겠지만, 내가 대체로 애정하며 찾는 공간들은 적막에서 백색소음 사이 이거나, 백색소음에서 웅성웅성 사이쯤인 경우가 많다. 유난히 연속적으로 바(bar) 자리에 앉게 된 날이 많았던 요 며칠, 바(bar)라는 공간이 주는 데시벨이 매우 자연스럽고 그 적당함이 너무 맘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바(bar)는 비싸고 화려한 칵테일 바(bar)나 호텔 바(bar)가 아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듯 하지만, 평범하지많은 않은 카페, 선술집, 밥집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좋아하는 데시벨을 가진 바(bar) 세 곳을 소개해볼까 한다.










적막감이 머무는 백색소음






앤트러사이트 서교점. 


앤트러사이트스럽지만, 다른 지점들과는 약간 다른 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은 음악이 없고, 직원들이 아주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는다. 조용한 분위기를 컨셉 중 하나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을 소문나게 만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도서관 같은 적막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2층의 크고 긴 바(bar)가 공간의 메인을 차지하는데,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약간은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카페라는 공간이 쉽게 시끌벅적해졌고 그것에 지친 사람들이 분명 많이 존재할 테지만, 이렇게까지 부자연스럽게 적막을 유도해야 할까 싶기도 했었다. 


바(bar)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핸드드립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기도 하고, 통유리로 탁 트인 정원에 눈이 가기도 한다. 음악이 없다는 게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조금 더 앉아있다 보면 그것도 나름 적응이 된다. 커피도 다른 곳 보다 비싸지만, 꼭 융드립을 골라 마신다. 커피를 내리기 전 뜨거운 물로 잔을 데워놓는 모습도 빼놓지 않고 구경한다. 지금까지 이곳을 세 번 방문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고민으로 뒤섞인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꺼내놨다. 











소박한 웅성웅성





일식 선술집, 1식당.



길 건너 망원동을 바라보는 합정동 끝자락쯤. 좁은 2차선 도로 양 옆으로 좁은 인도가 위치하고, 그 길을 따라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식당과 밥집, 술집들이 번갈아가며 자리 잡고 있는데, 합정동이지만 망원동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어딘가 동네스러운 분위기가 풍겨난다. 요즘 유행하는 느낌의 공간들은 진짜 자기 감성스러운 곳도 있고, 그저 느낌만 요즘의 것을 가져와 얹은 듯한 곳들도 있다. 


1식당은 마주 보고 앉는 4인석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고 전부 바(bar)로 되어 있는 작은 선술집이다. 다 앉아도 10명이 안 되는 좁고 긴 형태의 공간을 가진 가게다. 자리마다 정갈하게 놓인 물컵과 젓가락 셋팅, 조명이 인상적이었다. 앉자마자 메뉴판부터 살펴봤는데, 직원분들은 질문엔 친절해도 크게 간섭하거나 말을 걸진 않으셨다. 숙성된 듯한 모둠 사시미와 적당히 달큰한 쿠마닉이 공간을 더 아늑하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이야기가 고픈 어떤 저녁에 찾아가면 좋을 법한 곳이다. 주방의 복작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거스르지는 않을 만큼 들리고, 옆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내 이야기도 도란도란할 수 있을 법한 곳.










절묘한 데시벨





명동돈가스 1층.


이 곳을 이야기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잡스러움으로 가득 찬 명동거리 골목 한 켠에 자리 잡은 명동돈가스. 1983년에 문을 연 곳인데, 나는 여기가 맛있어서 찾아가는 건지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가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가게 되면 꼭 1층 바(bar) 자리에 앉는다. 오래도록 정갈함을 유지해온 듯한 이곳의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심야식당 같은 분위기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은 이곳만의 분위기를 지닌 또 다른 버전의 심야식당 같기도 하다. 서빙을 해주는 직원분들도 나이대가 있으신 편인데, 가끔 샐러드나 장국이 비어있으면 더 챙겨주시는 모습도 정감있게 느껴진다. 혼자 오거나, 둘이 온 사람들이 대부분 이 자리에 앉는다. 2층 손님의 음식도 1층에서 만들기 때문에 주방의 자리가 넓고, 바(bar) 자리는 공간에 비해 좁은 편이다. 듬성듬성한 인구밀도가 자연스레 만들어지고, 혼자 온 사람도 어색하지 않게 식사를 하는 모습이다. 둘이서 온 사람들이 가끔 이야기를 나누는데, 적당한 백색소음이 만들어진다. 


이 곳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Bar)의 데시벨



바(bar)에서는 서로 마주 보지 않고 앞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레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하게 된다. 시선이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이나, 내 앞에 물컵이나 소스통 같은 것들에 머물게 되기도 한다. 공간 안의 풍경 같은 것들을 바라보게 되면서 턱을 괴거나 팔짱을 끼기도 하는데, 적당히 여유 있는 마음을 만들어주는 제스처가 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도, 말할 준비도, 때론 혼자 그 공간을 즐길 준비도 만들어주는 마음의 여유. 


어쩌면, 매우 효율이 떨어지는 공간의 구성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더 많은 소비를 하고 빠르게 그곳을 떠나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공간의 데시벨이라는 것이 그곳을 머무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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