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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Nov 27. 2018

결론 없음에 대하여




잘 나가다가 엔딩이 빈약해지는 드라마가 있다. 



결말을 기다리며 과정을 즐겨왔는데,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로 마무리되면 실망하게 된다. 해피 엔딩은 안정적이고, 그게 아니라면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감동이나 슬픔이라도 남아야 한다. 마지막에 뭐라도 쥐어주면 과정은 미화될 수도 있지만, 결론이 나쁘면 과정도 흐릿해진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제3의 매력'에서 주인공 남녀는 두 번의 연애와 두 번의 헤어짐 끝에 다시 만났지만, 결국 주변인들만 해피 엔딩을 맞이하고 이도 저도 아닌 관계로 결론 없는 결말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드라마의 제목은 마치 제3의 매력을 지닌 남녀가 어떤 방식으로 오랜 기간 인연의 끈을 만들어내는지 제3의 방식을 보여줄 것 같은 이미지를 풍겼다. 어떤 결말도 진부함을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해서였을까. 결론을 내지 않음으로써 독특함을 얻어냈지만, 대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내진 못했다.










요즘의 결과물



요즘은 승패나 성과물로 보여지는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을 경험했고 얻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과정을 통해 어떤 잔상을 남기느냐도 어찌 보면, 요즘스러운 방식의 결과물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하진 않아도 되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싼 돈을 주고 들은 강연이 꼭 많은 기념품을 줄 필요는 없지만, 새로운 지식이나 달라진 마음가짐을 주지 못한다면 괜히 돈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공간에서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 한 장을 건져 올리지 못한다면, 그 공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맛없는 디저트와 예쁘지 않은 공간 중 어떤 것이 더 매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경험과 과정이 중요해지는 만큼 '공감'을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무언가가 되고 있다. 뻔해도 안되고, 마음에 남지 않아도 안되고, 스마트폰 카메라 속에 남지 않아도 안된다. 아무것도 없어도 뭔가가 있는 영상은 조회수와 좋아요의 풍성한 결실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결론이 없는 예술






성곡미술관에서 열렸던 <모르는 평범함>이라는 전시는 그야말로 결론을 주지 않는 불친절한 예술이었다. 천경우 작가가 프로젝트로 해오던 여러 가지 퍼포먼스 예술을 모아놓은 것인데, 그 자리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행적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내가 보고 온 것은 '기록물'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행했던 퍼포먼스 예술의 기록을 담은 영상, 사진, 오브젝트들이 미술관을 채우고 있었다.


일반적인 퍼포먼스 예술이라고 하면 작가가 직접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천경우 작가는 작품에 참여하지 않는다. 퀵 서비스 기사, 배달부, 청소부, 어린아이들과 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 강령을 제시하고 그것의 결과물을 그냥 보여주는 방식이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메시지를 품고 판을 까는 사람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전시의 한 켠에는 글을 쓰거나, 이름을 적어 관객이 완성하는 작품도 있었다. 어딘가에 이름이 남는다는 것이 두려워 주저하다가 참여하진 않았다. 어쩐지 흔적 없이 보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형태의 전시가 아주 생소한 것은 아니다. 현대미술을 다루는 전시에서는 직관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준다거나, 결과를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이런 전시들을 가끔 보는 편인데, 누군가에게 추천해주지는 않는다. 전시 어땠어?라고 물어올 경우 대답은 늘 한결같다. 호불호가 있는 전시야 라고. 실제로도 그렇다. 유명한 해외 아티스트나 브랜드의 볼거리가 풍성한 전시가 아닌 데다가, 해석점이 친절하지 않기까지 한 전시는 일반적으로 난해하다거나 별 것 없다는 후기로 귀결된다. 그래서 유명한 미술관들이 예술가의 업적을 총망라하거나,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아카이브 전시는 언제나 실패가 없다.


내게는 전시를 좋았다, 나빴다고 구분 짓는 것이 가장 어렵다. 입장권의 값어치를 어떤 기준으로 설정해야 할지도 의문이다. 가장 주관적이어야 할 것들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웬만한 전시와 작품들은 판단하지 않고 대체로 호의적으로 바라보며 느끼고 해석해보는 즐거움을 느낀다.


다만, '너무 가벼운'것을 좋아하지 않는 취향은 있다. 즉흥적인 것은 좋지만 고민의 흔적이 조금도 안 보인다거나 자기 것이 아닌 것들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면, 호의적인 마음을 거두게 된다. 이건 전시나 예술 작품뿐 아니라, 내가 느끼고 경험하고 사용하게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시선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결과가 중요할 땐 이유가 분명해야 했고, 과정이 중요해지니 명분이 필요해졌다. 이제는 의미부여를 위한 명분도 쓸모가 예전만큼은 못한 느낌이다. 스스로의 만족점이 가장 큰 경험의 결과물이 되면서 누군가는 '그래서 어쩌라고'할 법한 것들이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결국엔 이 글도 결론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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