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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Nov 22. 2018

모두의 효율



우리는 도시에 모여 살면서 편의적인 환경을 공동으로 누리기 위해 약간의 개인적인 불편함을 세금처럼 소비한다. 내가 번 돈이지만 그 일부를 떼어 주어야 국가에서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룰은 경제적인 것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모여 살수록 공동의 효율은 최고의 가치가 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 혹은 부속품이 되어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이치 같은 것이다. 다수결의 원칙은 빛을 발하고, 시간과 공간의 가성비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치가 된다. 우리는 저 높은 곳에 위치한 효율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선망하듯 바라보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 같다.










그렇게 믿으며 자라왔고, 살고 있다.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은 사회의 탓이 아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나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적응할 만큼 성숙되지 못한 나를 탓하며, 이 모든 것을 얼른 습득해 세상에 스며들고 싶었다. 작은 규칙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암묵적인 룰까지 배워야 할 것은 나의 다짐보다 훨씬 큰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눈치껏 행동해야 할 센스도, 내 생활의 밀도를 과도하게 높여 불태워야 할 열정도 모두 나를 위한 것인지 나에게 주어진 의무인 것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나의 세상조차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회 안에서 혹은 관계 안에서 좋은 평판과 인정을 받기 위해 고효율로 돌아가는 컴퓨터 본체의 팬 같았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팬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급하게 데워진 만큼 금세 식어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살아갔다.





한 방향의 순환



틀 안에서 지내다 보면, 모두를 위한 효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보다 소수의 효율이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세상에 뛰어들기 전에는 최소한 모두가 n분의 1을 담당한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지만, 알고 보니 각자가 가진 n의 값어치가 다름을 실감하는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소수의 효율을 위해 개인의 비효율이 극에 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반발보다는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스스로를 발견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한 방향으로 흐르는 효율이 익숙해지고 그것이 몸 안에 체화된다. 누군가의 쓸데없는 감정적 효율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에너지가 얼마나 바닥이 되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 그런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까.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지 못하고 이미 시작된다. 그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순수한 의구심을, 인식에 대한 재고를, 편견에 대한 진실을 가져볼 틈을 충분히 갖지 못한 채 세상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손해 본 듯하고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들지만, 어느새 누군가를 손해 보게 하거나 억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만 손해 본 게 아니고 세상은 원래 이런 거라고 쉽게 합리화한다. n으로 나누는 방식 자체를 바꾸기보다는 내가 가진 n의 값어치를 높이는데 몰두해야 덜 손해보고 더 가져갈 수 있다.










이기적인 안심의 효율



고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일하는 조직 안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습성 안에 효율의 법칙이 스며들어 여행을 가거나 물건을 사는 일상 안에서도 바쁜 내 시간과 돈을 쪼갠 만큼의 수확을 얻고 싶어 한다. '을'일 때 손해 본 것들이 '갑'이 되었을 때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다. 


심심치 않게 이야기되는 '노쇼(No Show)'의 심리에 대해 생각해봤다. 미리 예약한 자리에 굳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정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예약을 한다는 것을 최종적 선택이 아니라, 안심하고 싶은 하나의 보험 같은 장치로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어렵게 찾아온 시간이니, 최선의 선택을 놓치더라도 차선의 선택을 마련해 놓고 싶은 것이다. 늦잠을 잘 수도 있지만,  일찍 일어났을 때를 대비해 도서관 자리를 미리 맡아놓는 것이다. 지금 앉지 않더라도 나중에 돌아왔을 때 기다림 없이 앉아있기 위해 그 자리를 찜해놓는 것이다. 그렇게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식당을 예약하고, 안 볼 수도 있는 안 갈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수많은 것들에 보험을 들어놓는다.


이 이기적인 효율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연이어서 영향을 준다. 어디서부터 누가 먼저 시작한 도미노인지도 모른 채 다 같이 쓰러져간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듯 나도 모르게 걸음은 빨라지고, 지름길을 찾기 위해 앞을 보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혹시라도 먼 길을 돌아가게 되거나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나게 되는 건 반가움이 아닌, 짜증나는 비효율이 될 뿐이다. 세상은 효율을 쫓아가며 수많은 개인들의 비효율을 반복하고, 개인은 또 나만의 효율을 위해 누군가의 비효율을 초래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진다.



모두의 효율은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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