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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일기를 다시 꺼내어 보며

by 흔적



2020년 12월의 기록



해 봄부터 시동을 걸던 제로웨이스트 라이프에 본격적인 기름을 들이부었던 매일의 쓰레기 기록하기. 아마도 서울환경연합에서 무슨 챌린지를 하고 있어 참여를 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 같다. 2020년 12월 1일부터 한 해가 끝날 때까지 한 달간의 기록.

내가 만들어낸 쓰레기이자 곧 그날에 분리배출해야 할 쓰레기를 기록하는 일이었다. 스스로의 소비 패턴과 쓰레기 사용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챌린지였다. 가끔은 눈 질끈 감고 싶을 정도로 쓰레기가 너무 많았다. 그래도 기록을 쉬지 않고 이어갔다. 쓰레기의 재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과대포장되어 있는지, 재질이 제각각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첩을 정리하다 발견했는데 이 블로그를 운영하기 전이라 기록을 위해 그때의 추억을 다시 꺼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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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는 주로 먹는 것이었다. 주스 페트병, 맥주캔, 과자 봉지, 계란판 등등.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는 먹을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제로웨이스트 실천하다 보면 자연스레 주말농장에 관심을 갖게 된다. 쓰레기 0에 도달하는 길은 그 길밖에 없다. 물론 비료를 하나 사도 비닐에 들어있다.

플라스틱 용기는 쓰지 않으려고 하면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는데 비닐은 피할 길이 없었다. 모든 간식과 냉동식품이 비닐에 들어있으니 매일이 비닐이었다. 동구밭, 톤28 등 유명한 친환경 브랜드들을 하나씩 써보고 있던 타이밍이었는데 배송받은 포장재들을 보면 확실히 달랐다. 종이, 옥수수 충전재 등 생분해 가능한 친환경 포장재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크지 않은 브랜드에서는 잡지를 접어서 포장재로 대신 쓰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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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버리지 않고 재활용할 계획인 쓰레기들을 따로 분류해서 기록했다. 예를 들어 투명 비닐은 주방에서 필요할 때 재사용하기 위해 버리지 않았다. 양파주머니를 수거하는 곳에 보내기 위해 모으기 시작했었고 다 쓴 분유통 바닥에 구멍을 뚫어 화분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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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배출이 유난히 힘든 물건들이 있었다. 달력이나 스케치북의 스프링은 그대로 종이에 버리면 재활용이 안되기에 분리해서 버려야 한다. 제발 버리는 편의도 '편의'에 넣어 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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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소수지 코팅팬을 버렸다. 이때를 끝으로 스테인리스 팬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이유식 시작하며 밥솥 내솥도 올스테인리스로 바꿨고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후회하지 않는다. 불소수지 코팅과는 영원히 안녕하고 싶다.

이미 배달 음식을 먹지 않고 있을 때라 대부분의 쓰레기는 장 본 것들이다. 배달 음식 용기가 없다는 게 나름 뿌듯하네. 그래도 쓰레기는 만만치 않지만.

참 할아버지김은 비닐봉지 안에 김 양도 많고 플라스틱 트레이가 없는 것이 아주 장점이다. 맛도 최고라 정말 잘 먹고 있었는데 유재석님 유튜브에 출연하며 아무 때나 먹을 수 없는 김이 되었다. 흑. 내 할아버지김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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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습다. 아이 먹일 두부는 유기농, 계란도 동물복지 유정란, 한우. 내가 먹는 건 과자, 라면 쪼가리들. 그래도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아이가 돌 직전인 시기였다. 10개월이 되자마자 걸었기 때문에 12개월은 경보 수준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살아남은 나 자신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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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종이를 저렇게 찢어놨나. 아마도 아이 것이었겠지. 눈에 보이는 건 죄다 찢는 시기여서 더 갖고 있을 수 없는 벽 포스터 같은 것들이었나 보다. 이때쯤 종이 포장재의 종이는 비닐 코팅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무슨 과학자처럼 광택이 나는 종이 포장재는 죄다 찢어가며 실험 정신이 투철했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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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30일엔 새우깡을 먹었구나. 종이 쇼핑백으로 뭘 만들어보다 남은 쓰레기가 나왔던 것 같고.

한 달 내내 쓰레기를 모으고 사진 찍고 기록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그 미션을 해내고 나니 작은 성취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많은 걸 배웠고 반성했고 각성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쓰레기 일기를 열심히 기록할 수 있었던 건 1년 전 작은 노트에 썼던 쓰레기 일기 덕분이었다.





2019년 3월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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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살롱 모임을 열던 시절이었다. 주제가 환경이었고 살롱을 위해 작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환경에 대해 잘 몰랐지만 기록에 대해선 진심이었던 시절. 이 일기가 있었기에 1년 후 2020년의 쓰레기 일기가 있을 수 있었다. 식구가 셋이 아닌 둘이었기에 쓰레기양은 훨씬 더 적었었고 그날 그날의 생각과 고민을 짧게 써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빨대와 물티슈를 마음껏 써버렸다."라는 말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이젠 어디 가도 그게 먼저 보이는데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참.

4년 전, 5년 전 기록을 되돌아보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내 가치관, 생활 방식, 직업까지 정말 많은 것이 변했구나 싶다. 어찌 보면 변화무쌍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빌드업되어 오늘이 있는 게 아닌가 싶네.

나 스스로에게 미션을 준다는 건 그리고 그걸 해낸다는 건 엄청난 배움과 성취감을 주는 것 같다. 변화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그러니 1년에 한 달 1월만이라도 비건을 실천해 보자는 '비거뉴어리'같은 캠페인도 생겨난 거겠지. 1일 1채 식도 그렇고.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만큼 나 자신에게 즐거운 미션을 주면 어떨까.

5년이 지난 지금의 내겐 또 어떤 미션을 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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