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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Jun 14. 2019

단어의 이미지



잠에 들면서 혼자 곰곰이 떠올려보다가, 자고 일어나서 정리한 생각이다.


나는 평소에 어떤 단어를 자주 쓰는가.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가 사전적 의미를 신경 써가며 말을 한다기보다는 개인마다 특별히 자주 쓰는 단어가 있고 그 단어의 뉘앙스는 말의 맥락뿐 아니라, 아주 사적인 의도와 의미가 깔려있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서로에게 그 단어의 이미지는 다르게 기억되고, 내가 자주 쓰는 단어나 표현에 따라 나의 이미지도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단어가 이미지를 갖는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리는 아쉬운 부분도 있다. 그렇게 누군가는 나에게 다른 이미지를, 나는 또 누군가에게 나만의 시선을 덧씌워버리게 된다.


내가 자주 쓰는 단어를 몇 개만 꼽아봤다.










균형



나의 글과 말에서 '균형'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나는 항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일상과 마음가짐을 추구한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사실 나의 시간들은 극단적인 불균형 그 자체였다. 일과 일상의 균형을 추구할 여유나 틈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고, 일의 특성 역시 방향성을 잡아 누군가를 설득해야만 했다. 도무지 균형이라고는 추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한쪽에 치우치기만 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다 보니, 내 안에는 말로만 외쳤던 일상이라는 것과 균형이라는 것이 갈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프리랜서를 하면서 나는 나름 휘둘리지 않고 나의 방향과 자존심을 잘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때로는 부당한 상황들에 단호하게 대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유연한 균형점이었나 돌이켜보면, 명확하게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균형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도대체 어떤 균형점을 원하는 걸까. 적당히 일하면서 놀고먹을 수 있는 것이 일과 일상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내가 원하는 균형은 추상적인 마음의 만족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너무 좌절하지는 않을 정도로 포기할 수 있는 것. 이 정도면 내가 너무 손해 본 것은 아니라는 위안 같은 것.


어찌 보면, 가장 어렵고 영원히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균형'의 의미다.










취향과 감성



이 두 단어 역시 지난 몇 년 간 아주 자주 써온 단어들인데, 주변 사람들은 나를 떠올릴 때 이 단어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가 일하면서 업계에서 중요해지고 있던 흐름이자 추구했던 부분이지 내가 아주 취향적인 편이라거나, 감성적인 향유나 소비를 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고 보니, 일하면서 클라이언트에게 강조했던 키워드들이 너무 나의 개인적인 영역들을 잠식해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취향과 감성이라는 단어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얼마든지 달라지기 때문에 쉽게 단정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남들이 좋아한다고 다 똑같이 따라가는 획일화된 모습보다는 각자의 취향과 감성을 존중하고 그것들이 잘 어우러져야 더 창의적이고 매력적인 것들이 많아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것들을 강조하기 위해 아주 많은 분야의 사례와 장르를 조사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것들을 보다 보니 나의 취향과 감성은 아주 얇고 넓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소비는 생각보다 실용적인 것들을 우선하고, 디자인에 대한 선호도 역시 실용성을 담아낸 심플한 것들을 좋아한다. 어떤 한 분야에도 매니아적으로 오랫동안 좋아하거나 수집을 해왔던 경험이 없다. 반짝 좋아했다 금세 시들어지고, 새로운 것들을 흡수하는 데 바빴다. 


이러한 성향을 더욱 깨닫게 된 계기는 팟캐스트에서 '최애 시리즈'를 진행하게 되면서부터다. 각자 좋아하는 영화, 음악, 예술, 디자인, 브랜드 등 분야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취향적인 항목을 골라 이야기하다 보면, 한층 더 심도 있게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나에게 이것이 최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걸 적당한 관심과 애정도로 바라볼 뿐, 그 이상의 덕후 근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취향'과 '감성'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지만, 요즘은 여기저기 남용되고 있기도 하고 완전히 나를 표현하는 단어라고 하기에 내가 충분히 취향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민



그래, 어쩌면 이 단어가 나랑 가장 찰떡일 수 있겠다.


난 정말 많이 고민하고 고민해왔고, 앞으로도 고민을 이어갈 거다. 고민의 시간은 괴롭고 고되기도 하지만, 나는 가끔 고민을 즐기기도 한다. 모든 일에 충분히 고민하고 싶어 하고, 고심해서 결정하고 싶어 한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나의 마음은 그러하다. 물론, 세상일은 내 고민과 상관없이 흘러가기도 하고, 내가 오래 고민했던 것보다 짧게 고민하고 결정 내린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고민이 너무 오래되고 깊어지다 보니, 내가 도대체 무얼 위해 어디까지 고민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어버려 엉뚱한 결말을 초래하기도 했다.


나를 어지럽히는 고민 없이 단순하게도 담대하게 살고 싶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많은 두려움은 고민을 자꾸만 거듭하게 만들고, 행동하고 결정짓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고민하기보단 받아들이고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그 역시 앞으로에 대한 고민이겠지.


예전에는 친한 친구나 주변 사람들과 고민을 많이 나누었다. 어차피 답이 나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상대의 의견이 궁금했고, 이야기하면서 정리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느낀 건 다들 너무 바쁘고 각자 해결할 수 없는 고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둔 채 나를 만나러 온다는 것이다. 대부분 깊은 고민보다는 요즘의 근황을 공유하며 너무 어두워지지는 않는 정도의 걱정거리와 소식들을 늘어놓게 된다.


혼자서 더 많이 고민하게 된 건 고민의 색이 달라진 이유도 있다. 어릴 어느 진로를 선택할까, 어떤 학교를 갈까와 같은 선택이 명확한 고민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쌓이는 고민은 망망대해에 떨어진 듯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들 천지다. 여태껏 맞다고 느낀 모든 것들에 의문이 들고, 앞으로의 삶 역시 정해진 길이 없는 것 같아 더 벙찌는 기분이 든다.


'고민'이라는 단어는 내가 앞에서 언급한 '균형', '취향', '감성'만큼 많이 언급하거나 강조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나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일 수도 있겠다. 나는 이 고민이라는 행위를 정말 많이 해왔으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어떤 핵심 단어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자주 쓰기도 한다. 어떤 단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것은 개인을 알리는 마케팅이 될 때도 있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는 하나의 프레임이 되기도 한다. 작정하고 어떤 단어를 쓴 적은 없지만, 습관적으로 내가 내뱉는 단어가 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단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나와 얼마나 닮아있을까.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다를 수도, 나를 잘 알게 해주는 것일 수도, 어쩌면 진짜 나를 모르도록 만드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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