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동네 도서관.
내가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받았던 인상은 규모가 작고 그만큼 책의 양도 적다는 사실이었다. 다양한 장르와 신간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고 색이 바랜 오래된 책들만이 자리를 메우고 있는 듯했다. 책은 나에게 새로운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영감 중 하나인데, 이런 곳에서 번뜩이는 영감이 쏟아져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울을 떠나온 것도 나고 이 동네를 선택한 것도 나지..
독립서점 하나 없는 동네를 동네다운 동네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왔던 내가 선택한 동네는 독립서점 하나 없는 동네다. 가끔 마주치는 서점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문제집을 사러 들리던 서점처럼 생긴 '**문고'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별로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독립서점은 서울 갈 때 들리고 당장 급한 건 인터넷 배송을 이용하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집에 있는 책도 다 못 읽은 처지인 걸. 도서관이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책과 책방에 관한 인스타 계정을 따로 두고 있고 그 계정에서는 서점, 출판사, 책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들, 작가들을 팔로잉한다. 그러다 보니, 그 계정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많은 신간 정보가 우수수 쏟아진다. 나는 거기서 정보를 얻어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미리 찜해두기도 하는데, 새로운 책이 출간되는 속도나 흥미로운 책방이 생겨나는 속도에 비해 나의 독서 진도는 턱없이 느리기만 하다. 그럴 때 가끔 버거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뭐, 누가 서점 트렌드를 꿰고 있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지만, 나 혼자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는 거다. 그렇게 지나친 책들은 한두 권이 아니다. 기억도 다 못할 정도. 그렇다고 허겁지겁 속독으로 책을 읽고 싶진 않다. 그렇게 읽은 책들은 내 마음속에서 그리고 머릿속에서 금세 잊히기 마련이니까.
회원카드를 만들고 들어가 도서관 문을 여는 순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었다. 대충 둘러보아도 그리 크지 않은 공간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른쪽 서가에 신간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권 수는 많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내 구미를 당기는 책들이 없지는 않았다. 매번 망설이다 지나쳤던 책도, 얼마 전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마주쳤던 책도 그 서가에서 발견되었다.
도서관에서는 서점에서보다 좀 더 즉흥적인 우연에 맡긴 채 책을 고르게 된다. 서점에서는 책을 사는 비용의 부담도 있지만,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두게 될 경우 어딘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은 찝찝함이 지속된다. 그런데, 도서관에서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나를 발견했다. 툭툭 골라 앉아서 보다가 괜찮은 것 같은 책들을 추려 빌려온다. 물론, 내 성격상 빌려온 책을 다 읽지 못한 채 반납하게 되면 그것도 약간의 찝찝함이 남기는 한다.
어쨌든, 나는 이 작은 도서관을 더 자주 애용하기로 했다. 더 많은 책에 둘러싸이게 된 건 아니지만, 실망하는 대신 우연히 나의 생각을 다르게 물들일 책을 어떻게 만나게 될지 기대해보기로 했다. 벌써 세 권의 책을 빌려 두 권 하고도 반쯤의 분량을 다 읽고 반납한 후 2주의 텀이 돌아와 새로운 책 한 권을 대여했다.
도서관에는 적막이 흐른다. 카페와 다른 점이다. 몇 명이 있건 상관없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지만 공간에 흐르는 적막을 깨기는 쉽지 않다. 가끔 책장 넘기는 소리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나는 책 한 권을 골라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곧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내가 고른 소설이 재미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지나친 적막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졸림을 이겨내려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쳐다보게 되었다.
내 앞에 마주 앉아있는 어떤 여자는 한 번도 딴짓을 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없이 뚝심 있게 책 한 권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내가 도서관에서 일어설 때까지도 그녀는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나이가 좀 있으신 어떤 아주머니는 무슨 시험을 준비하시는지 여러 권의 책을 쌓아놓고 필기를 하고 계셨다. 중간에 지치셨는지 책상에 엎드려 잠깐 잠을 청하시기도 했다. 건너편 소파 자리에 앉아있는 남학생은 책 한 권 가져다 놓지 않고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로로 들고 있는 걸 보면 무슨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부동자세로 오랜 시간 계속해서 앉아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머무를 공간이 필요했던 걸까. 정장 차림의 어떤 여자는 잠시 업무를 보러 왔는지 아이패드를 꺼내 무언가를 바삐 보다가 금세 사라졌다.
흔히들 서울역이나 인천공항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고들 말한다. 떠나고 도착할 때의 상기된 얼굴이나 아쉬워하는 표정들. 도서관에서도 적막 속에 각자의 흐름에 따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느낄 수 있다. 대놓고 쳐다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머무르다 보면 은근히 나도 모르게 힐끔거리게 되는 식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엔 그저 그런 것 같았던 소설은 한 장 한 장 읽을수록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들으면 누구나 아는 소설가의 책은 오히려 이제 와서 읽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갑자기 무언가를 읽기에 늦은 시간이라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 책 한 권을 읽다가 집으로 가져왔다.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건 나에게 아마 많은 생각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이 작은 동네 도서관에 좀 더 자주 긴 시간 머무르고 싶다. 책을 빌리기 위함 뿐 아니라, 이 공간에서 많은 상념들을 늘어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