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 감정은 나보다 빨랐다.

내 감정은 왜 그 사람 말대로 되었을까

by 주한하루

“너 지금 짜증났지?”


그 말은,

내가 꺼내지도 않은 감정을

먼저 정의해버린 순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넘겼을 말인데,

그날만큼은 이상하게 불쾌했다.




사실 그날의 나는,

쓰러지기 직전의 종이 탑 같았다.


별일 없는데도,

마음은 이상하게 흔들렸다.


그런 날엔

누가 웃어도,

누가 다정해도,

나는 왠지 조마조마하다.




“얼굴 보고 싶어서 왔어!”


갑자기 집 앞에 도착한 그 예쁜 얼굴.

평소라면 반가워 마지않았을 그 미소가,

그날따라 당혹스러웠다.

잘못 배송된 택배 같았다.


그치만 나는,

상대의 기대에 맞춰 웃었고

카페로 향했다.




그날은 따뜻한 게 끌렸다.

‘따듯한 당분이 좀 들어가면 기분이 나아지겠지?’

기분이 좋아지면,

그 사람과 더 예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라멜 마키아토를 주문했다.

따뜻한 걸로.


그런데,

나온 건 아이스였다.


어찌 보면 사소한 사고.


그치만 바꿔달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괜찮아요, 그냥 마실게요.”

상대가 먼저 대답해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 커피를 마시면서도,

속이 이상하게 쓰린 것 같았다.




어지러운 대화 속에서

나는 점점 집중하지 못했고,

상대의 말을 들을수록

상대와 내가 멀어진 듯했다.


이상한 연극에 홀로 떨어진 것 같았다.


“너 표정이 왜 그래, 화났어?”

“그냥 피곤해서 그래.”

“너 지금 짜증났는데?”


내 표정이 너무 티 났던 걸까.

내 배려가 조금 부족했을까.


“커피 때문이면 진작 말하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는 벌써

내가 ‘짜증’냈다고 내 감정을 규정했다.


“내가 바꿔오면 되잖아.”


그 순간,

내 감정은 유난처럼 보였고

내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작은 서운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할 감정처럼

조용히 내 안에서 식어갔다.


그래서 용기 내어 말했다.


“그냥 말해볼게.

나도 너 봐서 기뻐.

근데 자꾸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정제한 말투였다.

그런데 상대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피곤했어. 그래도 너 보고 싶어서 온 건데.”


그 말은,

내 감정보다는,

그 사람 자신의 감정을 더 확신하고 싶어서한 말 같았다.




그렇게 그날,

나는 그 사람을 웃으며 보냈다.

짜증나지 않은 얼굴로,

꽤 괜찮은 사람처럼.


내 기분 때문에

남에게 상처 주는 건

성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혼자 돌아와보니,

조금 내가 우습고,

조금 슬펐다.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이 관계가 어딘가 어긋나고 있다는 자각이

내 안에서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것은.




홀로 돌아온 나는,

말하지 못한 감정 속에 잠시 머물렀다.


상대가 내 감정을 ‘짜증’이라 부른 순간.


그때부터 내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누가 내 감정을 알아차린 척하면서

다른 말로 바꿔 적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나의 언어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다음번엔,

내가 먼저 내 감정을 알 수 있도록.


지금 이건,

짜증이야?

슬픔이야?

아니면…

그냥 지나가듯 잊을 일일 뿐이야?


내 마음을 다듬는 동안에도,

그 사람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연락했다.

그게, 나는 아직 조금 아프다.


무엇보다,

내 감정을 대신 설명한 그 말들이

이상하게 내 감정을 침범하곤 했다.


그래서 우습게도,

나는 내 감정에 이름을 더 빠르게 붙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잃어버린 사전을 다시 만들듯,

하나씩 내 감정의 뜻을 찾아 쓰기로 했다.


어쩌면 감정을 설계한다는 건,

누가 붙인 이름을 지우고,

다시 적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상하더라도 조금씩,

별나더라도 섬세하게

나를 헤아리기로 했다.


내 감정에

이름 붙일 수 있게.




결국, 그 사람과는 그렇게 멀어졌다.

진심을 꺼냈지만,

그 말은 닿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나는

그 감정을 조용히 헤아리는 중이다.


내 감정 안에 마련한 마음의 자리에서.


그렇게 나는 다시,

내 감정 안에 조용히 자리를 마련했다.



감정을 음미하고 싶었지만, 그날은 삼켜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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