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엔 정말 괜찮았지만

어떤 감정은, 마음보다 몸에 먼저 도착한다. 설계되지 않으면 무너진다.

by 주한하루

”오빠가 또 다른 여자 인스타에 하트 눌렀어. 이거 봐.”


이번 주만 세 번째였다.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이상하게,

‘그 애의 감정’보다 ‘내 반응’을 먼저 떠올리게 했다.


그 말은 이제 내 감정을 통과하지 않는다.

위로도 조언도 아닌,

그저 들어주는 역할.




처음엔 괜찮았다.

친구의 감정을 들어주는 건,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뜻일 거라 생각했다.


조금 지치긴 했지만,

그 신뢰가 고마워서, 괜찮다고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던 나를,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느꼈다.


핸드폰을 꺼내보지도 못했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의 나는,

내 감정을 어디에 두고 온 것 같았다.




그날 밤,

방을 정리하다 말고 눈물이 떨어졌다.


‘왜 이럴까?’


처음부터 괜찮았던 건 아니었다.

그저 괜찮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오늘 즐거웠어’ 한마디 없는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그 말이 없다는 사실조차,

이제 와서야 떠오르는 걸 보면—

나는 감정을 너무 많이 받아줬던 거다.


아니,

감정으로 소모당했던 거다.




감정이 빠져나간 자리에

무력감이 서서히 고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이 나아지는 게 아니라,

조용히 말라가고 있었다.


말은 들었지만,

나는 내 안의 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생각보다 오래 멈춰 있었던 마음은,

스스로도 돌아보지 않으면,

끝내 텅 비게 된다는 걸.


그리고 나는 아주 조용히,

그 감정 안에서 멈춰 섰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자각했다.


감정을 설계하지 않고 받기만 하면

내 마음은 남이 쓰고 버린 종이처럼 구겨진다.


다정함은,

계획 없이 사용되면 낭비된다.


그날 이후 나는,

조용히 거리 두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친구로서의 의리를,

나 혼자만 미련하게 지키지 않기로 했다.


말을 들어도,

마음은 남겨두는 법을 익혀갔다.


그날 이후 나는,

눈을 마주쳐도

생각은 한 걸음 물러서는 법을 연습했다.




사람의 말에는 온도가 있다.

그 온도에 따라 거리를 조절하는 건

이제 나의 책임이 되었다.


지금도 그 친구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나는 예전처럼 다정하진 않지만,

그만큼 무너지지도 않는다.




감정을 설계한다는 건,

무너진 마음을 다 적어두고

그 옆에 조용히 무늬 하나를 새기는 일이다.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설계는 결국,

감정이 흘러가도 흔들리지 않게

바닥에 감정의 결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늘,

나는 내 감정이 흩어지지 않도록

아주 조용한 선을 하나 그었다.


그 선은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한 게 아니라,

나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끔은,

그 순간의 나를 지켜보는 내가 된다.

조금은 다정했고, 너무 많이 무너졌던 그때의 나.




그 의자엔 말은 남았고, 마음은 사라져 있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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