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업에서, 도서관을 방문했습니다. 저는 도서관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추석이라는 긴 시간을 위해서, 책을 빌리고 독서를 하라는 배려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다음 학교에 가는 날은, 10월 9일입니다. 정말 긴 연휴를 얻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 학교의 도서관 2층에서, 저는 우연히 보르헤스의 명언을 보았습니다. 보르헤스를 보고 바로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는 저도 어지간한 문학 소년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저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이라는 책을 빌렸습니다.
여러분은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까?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에게 하늘은 벌을 주었고, 그들의 언어를 모두 나누었다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는 많은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의 언어라는 것은. 어떠한 독자가 읽는지. 어떠한 시간에 존재하는지. 모든 상황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한국의 유머 중에서는 조금은 슬픈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 엑스가 트위터로 이름이 불리던 시절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한국어로 ‘네가’라는 뜻이 뭐야?”라고 묻는 외국인에, “그건 ‘너’라는 뜻이야.”라는 이야기.
어릴 때에 저는 책을 읽으며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난독증을 말하며,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병이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병을 조롱의 의미를 담아 욕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해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글자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병입니다. 어떤 날은 제가 책을 읽으며 머리가 정말 하얗게 변하더니. 글자가 글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심각한 병에 걸린 것만 같아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블랙홀을 바벨의 도서관으로 표현합니다.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 사라진 수많은 정체가 불분명한 인식 불가의 암호문들이 존재합니다. 저도 바벨의 도서관을 읽지 않아서 오늘 읽어보려고 합니다. 역사에서 사라진 어떤 많은 책들은 먼지가 되어서 블랙홀에 빠져, 영겁의 시간들을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생각하면서, 저는 이제 글을 흐르듯이 쓰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생각을 글로 남기면서 이제는, 글자와 단어를 생각하지 않아도 그 형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부분을 깨닫습니다. 사실 이제는 저도 글자를 글자로 인식하지 못하는 시기. 도서관의 블랙홀에 빠진 것은 아닌지 깊이 고민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 고민을 했더랍니다.
-내 글이 어떤 자연법칙에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파이는 오래된 과거부터 3.141592...로 시작되는 무리수였습니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을 쓴 시대와 나의 시대는 너무도 다릅니다. 천재적인 그의 글에는 어떠한 반감기가 있어서, 점차 흐려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느낄 수가 없음에 무수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르헤스만이 아니라, 지난 모든 과거를 보아도 마찬가지인 일입니다. 사라진 예술가들. 남아도 반감기가 끝난 예술품들.
-과연 나의 문학은. 반감기가 몇 년인가.
그리고 저 위험천만한 보르헤스의 문학은. 동위원소가 몇 개인가. 그것은 파동인가 입자인가. 보르헤스가 창조한 항성에는 몇 개의 행성들이 공전하고 있는가. 시간을 살고 있다는 저주에 갇힌 인간이 창조한 문학은, 불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어제도 같고, 내일도 같은 어떤 언어는 없겠습니다. 어제의 삶은 오늘을 인식하기에 어렵고. 내일의 삶은 지난 과거의 언어를 동일한 뜻으로 바라보아도. 우리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보르헤스와는 다른 원자와 항성이지만, 지어질 수 없는 바벨을. 이카루스처럼. 더 높이 나아가고 싶긴 합니다.
이십삼년 구월 이십칠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