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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pty May 13. 2023

인생 첫 민방위, 하지만 2년 차였다.

참 신기했다. 2주 전부터 민방위 소집을 위한 문서가 도착해서 열어봤더니 예비군이 아닌 민방위 훈련을 받으라는 문서였다. 내가 군대를 조금 일찍 가긴 했지만 벌써 예비군을 마스터하고(?) 민방위로서 '찐 아저씨'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났던 것은 교통비는커녕 훈련 오는 민방위 대원들을 위한 혜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민방위 훈련장은 석계역 근처에 있는데 우리 집에서 훈련소까지 최대한 이동 동선을 줄이기 위해서는 광역버스를 타야만 했고 심지어 환승도 해야 했다. 그렇게 가는 것이 가장 가깝고 빠르게 갈 수 있었지만 오며 가며 교통비도 지급하지 않는 민방위 훈련이 조금은 화가 났다.



(예비군 훈련이었나 동네 동사무소에서 진행하는 훈련은 마치면 12,000원이었나 훈련비용을 따로 현금으로 지급했었다. 훈련 수당이라고 5만 원, 10만 원씩 지급하라는 게 아니다. 최소한 오며 가며 생업도 미루고 온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교통비나 시간을 대체할 수 있는 혜택을 전혀 주지 않았다.)


내가 벌써 예비군 훈련을 끝마치고 민방위 훈련을 한다는 게 너무나도 당황스러워서 가는 길에 찍어봤다. 버스가 빠르게 도착한 덕분에 훈련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다. 도착해서는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로 갔고 맨 뒷자리에 앉으면 앞으로 당겨 앉아야 한다는 다른 블로그의 후기를 보고 가서 그런지 적당히 잘 앉았던 것 같다. (다행)



이번이 첫 민방위 훈련이지만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일단 한번 훈련을 하게 되면 꽤나 큰 강당에서 진행을 하는데 족히 2-300명은 되는 인원들이 있지만 정수기는 고작 3-4대밖에 없었다. 그리고 환경보호의 일환인지는 모르겠지만 종이컵을 두지 않았고 학교 다닐 때 자주 애용하던 바람 불어서 입구를 넓혀서 쓰는 정수기컵을 사용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있으면 물도 많이 마실텐데 그 작은 종이컵으로 한번 물을 떠서 마시고 또 마시고 또 마시고 다음 사람은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고. 그런 환경들을 조금이나마 개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을 했다.


아무리 예비군이 끝나고 민방위로 넘어왔다지만 최소한의 배려는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거 말고는 딱히 크게 불만은 없었던 것 같다. 혼자 가서 심심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지루했고 생각보다 재밌었다. 지진훈련 하는 강사님의 언변이 아주 뛰어나셨고 중간중간 섞어주시는 농담도 꽤나 잘 먹혔다.


대원님들 피곤하시니까 제가 질문하더라도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대답하면 되니까요라는 말도 참 위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서 어디다 퍼 나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초상권 문제 때문에 사진은 촬영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사람 없을 때 찍었으니 최소 초상권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첫 민방위라 찍고 싶었음)



지진 및 화생방 강의실이었는데 꽤나 잘 만들어놨다. 왼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강도를 조절할 수 있었는데 강도 3, 5, 7 이렇게 세 가지가 있었고 지진 7은 저게 진짜인가 거짓인가 싶을 정도로 충격스러웠다. 나는 남들보다 훨씬 예민한 편이라서 지진이나 흔들림, 울림을 잘 느끼는 편인데 저렇게까지 흔들리면 정말 집이 박살 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흙더미나 잔재들 속에 파묻히는지도 어느 정도 실감이 됐다.


사실 첫 민방위라 꼭 흔적을 남기고 싶었지만 훈련이 모두 종료되고 퇴실을 하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나는 1년 차가 아닌 2년 차였다는 사실(!) 당연히 민방위라는 텍스트를 처음 접하니 1년 차가 맞겠지, 내년에 또 와서 4시간을 죽치고 가야 되네-라고 짜증 아닌 짜증을 부리다가도 내년 민방위 훈련을 할 때 여기 오면 4시간은 회사 밖에 있을 수 있으니 그마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난 내년부터 3년 차라서 현장에 오지 않고 온라인 동영상 시청 2시간으로 바뀐단다. 좋기도 하면서도 조금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엔 따릉이를 타고 왔는데 48분을 정말 미친 듯이 자동차들과 경주를 하면서 왔다. 오랜만에 고즈넉한 분위기와 맑고 높디높은 하늘, 그리고 피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눈이 자꾸 감기려고 하는 걸 보니 오늘 운동은 생각보다 효과가 대단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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