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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pty Sep 08. 2023

일은 하는데 돈은 안 모으려고요.

지금의 나는 일을 하고 있다. 아주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찌 됐건 일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한다는 것이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술을 좋아하니까 술을 마시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날만 일을 하러 나가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집을 혼자 지키면서 집안일을 한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개는 것까지. 그리고 설거지가 있으면 설거지까지 하고 강아지가 흩날린 털을 청소기로 빨아들이는 청소까지 한다. 사실 나는 청소와 정리정돈에 더 특화된 인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청소를 좋아한다. 물론 더럽고 너저분한 모습보다는 깨끗한 모습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유난히 더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됐던 청소를 좋아하고 집안일을 좋아하는 나는 점점 정체성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밖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오는 사람의 역할보다는 집 안에서 서포트하는 역할이 더 어울리는구나라는 사실을.


이미 세상은 많이 바뀌고 바뀐지라 남자가 일을 하고 여자가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나는 사회생활을 누구보다도 잘 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뒤에서 서포트할 수 있는 일을 찾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에어비앤비 청소 아르바이트라던가 야간에 혼자 하는 일이라던가 그런 일을 구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경력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4대 보험을 해준다고 했던 회사에서는 사무직인 줄 알았으나 결국 뺑뺑이를 돌리는 청소 업체였고 1년 정도는 현장 일을 뛰면서 청소를 하면서 그 이후에는 관리직으로 전향하자고 이야기를 했던 곳이었다.


나는 직전 회사였던 청소회사에서 1년을 버티고 나왔기 때문에 청소에는 자부심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에어비앤비를 대상으로 관리를 하는 회사는 차원이 달랐다. 에어비앤비는 호텔 같은 개념이라 쓰레기를 온 집안에 버려두거나 침대 위에 무언가를 쏟더라도 이해해야만 했었다. 처음으로 투입된 연남동의 3층 빌라에서는 여자 4명이 사용했었고 콘돔이 나오기도 하고 온갖 쇼핑을 하고 난 쓰레기를 내팽개치고 체크아웃하기 바빴다.


처음 투입된 빌라의 크기는 3룸에 화장실이 하나 딸려있고 작은 베란다 겸 창고가 있는 집이었다. 정말 온갖 쓰레기를 모두 버리고 나가버렸다. 그런 곳을 청소를 말끔히 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청소기는 있었지만 상태는 좋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청소를 70% 마무리 지으던 와중 중국인 가족이 와서 되지도 않는 영어로 체크인 전에 짐을 맡겨둘 수 있겠냐며 이야기를 했고 아무런 힘이 없는 나는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겪은 감정은 참 다양했다.


나는 청소라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화장실 청소는 예외다. 화장실은 정말 청소를 못하겠다. 평생 서울촌놈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더러운 모습을 못 봐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남들이 사용한 화장실을 청소하기 싫었다. 물기를 닦고 변기를 닦고 만지는 행위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모험이었다. 그리고 콘돔부터 온갖 쓰레기를 버리고 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오죽했으면 내가 노예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회사를 뛰쳐나왔고 여자친구를 도와서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사업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있지만 여자친구가 중간에서 중재를 잘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문제는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지만 돈을 모으는 것이 목표도 아니고 돈이 목표도 아닌 인간을 이렇게까지 신경 써준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기만 하다. 참 많이 미울 때도 있지만 대견스럽고 어른스러울 때가 더 많다.


나는 돈을 모으지 않고 이번 생에 모든 것을 사용하려고 한다.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돈을 모으지 못해도 즐기기로 했다. 돈은 어차피 모으지 못하는 인생일 테니까 버는 족족 쓰더라도 나는 불만이 없다. 내 인생은 이미 마이너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플러스다. 더 이상 누릴 사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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