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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운이 없었던 적은 처음

by empty

1년 전쯤 뇌파 검사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아직도 결과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때 받았던 충격이 고스란히 재현된 기분이다. 그때 내 검사를 도와주셨던 간호사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어도 당신의 뇌는 활발해요 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그냥 뇌에서 쓰는 에너지가 남들보다는 많은가 보다- 하고 넘겼지만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오늘은 정말 처음 경험했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서 중간에 주저앉을 뻔했다는 사실을.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어디든 나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물론 나가서 사진을 찍는 날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집에 있는 것도 싫고 답답해서 억지로라도 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가려고 마음을 먹고 카메라와 핸드폰, 애플워치와 에어팟을 순서대로 충전기를 꽂은 상태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가장 중요한 옷을 골라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물론 나는 근 2년 새 내 손으로, 내 돈으로 옷을 사본 적이 없다. 백화점이나 아웃렛에 가서 남자 옷을 둘러보기만 해도 남자 옷이 이렇게 비쌌나? 싶을 정도로 옷 하나의 가격이 너무나도 비싸서 옷을 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 옷을 기본적으로 조합할 줄 모르기 때문에 무슨 옷을 사야 할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최신 유행을 따라가자니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싫었다. 마치 한 때 유행 했던 모나미 룩이나 집단 노스페이스 패딩 등 그런 유행은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독자적인 패션을 추구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못 입지는 않는구나, 그냥 군중 속에 사람들 속에서 눈에 띄지 않고 적당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 적당한 것이라는 것조차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기본 아이템들부터 사려니 또 기본 아이템은 뭔지 그 이후의 구매해야 하는 옷은 뭔지 진짜 모르겠다. 유튜브에서 하나씩 알려줘도 당장 장바구니에 옷을 두세 개만 넣어도 십만 원 십 오만 원이 되는 시대에 사람들은 이 큰돈을 주고서라도 옷을 산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은 아닌데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은 대기업을 다니면서도 매일같이 옷을 산다고 한다. 똑같은 옷이 있는데도 계속 비슷한 옷이 옷장이 넘쳐나서 버리기도 애매하고 놔두기도 애매하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 들은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자니 내 마음속에서는 '그래,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저렇게 누리고 살거나 비슷한 옷만 사는 수치를 부릴 수 있는 거지 나같이 돈도 못 버는 사람이 옷은 무슨 옷이야'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번씩 옷을 입으려고 고를 때마다 입을 옷은 없고 없는 옷으로 조합을 하자니 그것도 복잡하고 머리가 아프고 한 번 나갈 때마다 옷을 네다섯번은 갈아입곤 하는데 정작 이 정도로 만족하고 나가야지 하고 거울을 보면 항상 똑같은 옷만 입고 있었고 이마에 땀은 송골송골 맺혀있고 앞머리는 중구난방으로 뻗어있고 아주 총체적 난국이 따로 없다.


그렇게 해서 오늘도 어김없이 나갔다. 날이 많이 풀려서 꽤 오래 돌아다녀도 무리가 없는 날씨였다.


그렇게 5시가 조금 안된 시간에 집에서 출발해서 압구정으로 갔다. 물론 내 의지로 압구정이란 동네를 절대 가지 않을 것이었지만 부득이하게 카메라 액세서리를 구매해야 하기 때문에 압구정으로 갔다. 피 같은 20만 원이란 큰돈을 쓰고 나오는 길에 비가 오길래 바로 옆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시켜서 1시간가량 핸드폰으로 시간을 때우고 비가 그친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카메라와 짐을 챙기고 나와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그렇게 압구정 골목골목을 누비다가도 메인 골목도 갔다가 갔던 골목을 또다시 돌아다니기도 하고 참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도 신경 쓸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많았다. 하나씩 기억해서 나열해 보자면


1. 내 카메라를 보는 사람들은 본인을 몰래 찍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2. 카메라를 거쳐 나와 눈이 마주쳤던 사람들은 나에게 본인 사진 찍은 건 아니냐고 오해하지 않을까?

3. 차 도로변으로 걷다가 차가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치고 가면 어떡하지?

4. 어디를 돌아다녀도 찍을 만한 소재가 없는데 어디를 가야 하지?

5.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뭐고 내가 찍고 싶어 하는 사진은 도대체 뭐지?

6.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제대로 가는 건 맞나?

7. 미어캣처럼 오른쪽, 왼쪽을 병적으로 둘러보고 주변을 경계한다


대충 내가 느꼈던 것들은 이 정도인데 추가적으로 에어팟을 끼고 있어서 누가 날 치거나 시비가 걸리면 어떡하지?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가 지나다니는 차를 긁거나 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내 머리는 정말 터질 듯만 했다. 게다가 보험비가 꽤 연체되었는데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전화를 하는 보험사 아줌마와의 2-30분 통화까지.


저 수많은 생각들을 길을 걸으면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부랴부랴 찍으면서 생각을 하면서도 뭘 찍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 걱정까지 계속해서 뇌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뇌에서 계속해서 쉬지도 않고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역 앞에서 더 찍을만한 건 없을까? 오늘은 사진을 별로 못 찍었는데 이걸로도 괜찮을까? 괜히 교통비만 날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하나씩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긴장된 상태에서 지하철을 탔다. 서있을 때부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빈자리에 겨우 앉아서 30분가량 집으로 오면서 정말 기절할 뻔했다. 계속 생각했다. 밖에 있었던 시간이 5시간 남짓인데 난 왜 이렇게 아무런 기운이 없고 힘이 왜 이렇게 빠지는 걸까 도대체 왜?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이 너무 많아서 지하철에서 계속해서 졸았다.


그렇게 지하철 역에서 빠져나오면서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그렇게 집을 2-30분 천천히 걷다가 집 근처에서 도저히 더 이상은 걸을 수가 없어서 길 가다가 보인 원형 돌에 앉아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사진을 많이 찍은 것도 아니고 다른 걸 한 것도 없다. 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실시간 고민과 생각들을 혼자 쳐내지 못하고 계속 불안해하는 것이 원인이었는지 정말로 방전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까지 피부로 체감을 해본 적이 처음이라 너무 무섭고 낯설었다. 모든 부분에서 걱정이 앞서고 사람을 마주치면 피하게 되고 숨게 되는 것 같다. 진짜 점점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며칠 전 글을 못 써서 죄송하다고 쓴 글부터 조짐이 보인 건 아닐까 싶다. 평일에 가족을 피해 부산에라도 내려가 있을 작정이었는데 바다 근처 숙소도 하루에 4-5만 원씩은 줘야 하는데 그 큰 원룸에서 혼자 있으면 뭘 하겠나 그렇게 숙소비로 15만 원가량 쓰고 오며 가며 고속버스 비용으로 6-7만 원 쓰고 돌아오면 나에게 남는 건 뭘까 싶은 생각도 들고


진짜 왜 이럴까 요즘 아니 앞으로 더 큰일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게 공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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