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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라 Jan 23. 2018

사진 없는, 런던 여행의 짤막한 기록



파리에 돌아가기 전에 런던에서 4박 5일간 머물렀었다.

첫날 오페라를 예약해 두었었는데 런던 중심지로 향하는 기차를 잘못 타서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약 한 달간의 여행을 해오면서 단련이 되었는지 우리는 재빨리 다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원래는 한참 돌아서 반대쪽 플랫폼으로 가야 했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가장 빠르지만 위험한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무사히 숙소 근처에 도착했지만 오페라 표를 받으러 가기까지의 과정도 쉽지 않았다.

기차를 잘못 타서 시간을 지체하느라 모든 게 딜레이 됐다. 계획대로라면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여유롭게 나와서 매표소에 가서 표를 받은 뒤 식사를 하고 오페라를 감상하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결국 둘 중 한 명이 역에서 캐리어를 지키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이 오페라 표를 얻으러 갔다 오기로 하였다.

J는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J가 떠난 뒤 나는 무거운 짐들을 이끌고 킹스크로스 역을 어슬렁거렸다.

내 짐과 J의 짐까지 가지고 있어서 어딘가에 들어가 있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힘들게 카트를 찾아내어 우리의 짐을 한 데 모으고 나서야 의자가 있는 곳에 앉을 수 있었다.

J는 결국 표를 제시간에 받아왔다. 대단했다. J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오페라를 보았다. 

그날은 정말이지 둘 다 녹초가 되었다.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았다. 

런던에서 머문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딱히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앞으로의 해외여행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는 일은 기피하게 될 것 같다. 완전히 질려버렸달까.



다음 날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보기로 하였다.

아침에 J에게 버킹엄 궁전에 가서 근위병 교대식을 보자고 말했을 때 그녀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라 우리는 확실히 지쳐있었다. 게다가 다른 게스트 때문에 J는 잠을 설친 상태였다.

잠시 후 J가 오늘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조금 늦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근위병 교대식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가야 했다. 우리는 각자 원하는 게 달랐기 때문에 굳이 누군가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런던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장 언제 생이 끝나버릴지 알 수 없으니.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우리는 하루정도 떨어져 다녔다고 해서 그런 일로 서운함을 느낄 성격도 아니었다. 그리움이라면 몰라도.

J의 제안대로 하루를 보내보는 것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 24시간 내내 함께 붙어있었기에 좀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란 힘들었다.  

나는 그녀의 제안에 수긍했고 먼저 준비를 하여 나왔다. 그때까지도 J는 침대에 누워있었던 것 같다.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는 길이 꽤 마음에 들었다. 역에서 나왔는데 아주 푸릇푸릇한 공원의 모습이 펼쳐졌다. 

삭막한 겨울에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공원은 아주 넓었다. 그곳에서 아침 조깅을 하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교대식을 보기 위해 혼자 서 있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맨 앞줄에는 한국말을 하는 형제가 있었다. 그 애들은 우애가 좋아 보였다. 

내 바로 앞에는 키가 큰 외국인 노부부가 있었다. 영어를 쓰고 있었는데 영국식 영어는 아니었다.

교대식 시간이 다가오자 인파가 불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있던 부부 중 남자가 나를 살짝 잡아당겼다. 알고 보니 키가 큰 자신 때문에 내가 교대식을 잘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나를 그들 앞에 세워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였고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꽤 좋은 자리에서 교대식을 볼 수 있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리니 몇몇 사람들은 이내 자리를 떠났다. 

나는 끝까지 보고 테이트 모던으로 향했다. 

테이트 모던에서 보낸 시간 동안 정말 행복했다. 

거대한 공간에서 온갖 작품들을 원하는 대로 보는 기쁨을 누렸다. 

그곳에서 한가롭게 전시를 본 뒤에 런던 브릿지가 보이는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카페에 갔다. 

비가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차도 마셨다.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그다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염없이 바라보기엔 나쁘지 않은 장면이었다. 

어두워질 때가 다가오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J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코벤트 가든에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한국음식을 먹고 거리의 악사들과 소품샵들을 구경했다고 했다. 그녀도 나도 서로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낸듯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엄청나게 많은 비가 내렸다.  



다음 날에는 포토벨로 마켓에 갔었다. 숨어있는 장식품샵이나 빈티지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캐드키드슨 매장에는 한국인 여자 직원이 있었다. 유니크한 옷을 파는 매장에서 깃털 달린 티셔츠를 살까 말까 오래 고민하다가 그냥 나왔는데, 후회된다. 또 다른 편집샵에서 세일하던 스투시 티셔츠를 그냥 두고 나온 것도.

노팅힐 서점은 물론 오래전 것이기는 해도 영화 속 매력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그런 기념품 가게처럼 보였다. 

우리는 계속 걷다가 포토벨로 가장 끝에 있는 가게까지 갔다. 그곳에서 아주 예쁘고 작은 장식품을 적당한 가격에 구매하여 기뻤다.  

 


런던에서는 오페라를 관람했던 첫날 빼고는 날씨가 계속 안 좋았다.

익히 들었던 대로 흐린 날씨에 비가 자주 왔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에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핸드폰에만 사진과 영상을 담아왔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런던 사람들이 정말 비가 와도 우산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웬만한 비바람에는 코트 깃을 더 세우거나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장대비가 내리는 때엔 여행자들도 런던 사람들도 모두 우산을 펴 들었다. 

그렇게 해도 온몸이 금세 비에 젖을 정도로 날씨가 궂었다. 

파리로 넘어가기 전에 플랫폼 근처에서 마신 포트넘앤메이슨 티가 꽤 맛있었다.

궂은 날씨 덕분에 런던에서 마셨던 따뜻한 티가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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