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photograph
가끔 영화 <봄날은 간다>를 다시 꺼내어 보곤 한다.
볼 때마다 이입되는 인물이 달라져서 신기하다.
한 번씩 삶의 어느 한 지점을 넘어설 때마다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추운 겨울날,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그리워하며 혼자 불 꺼진 방 안에서 본 적도 있고
한국영화 수업을 들을 때 분석을 위해 다시 보기도 했고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진 뒤엔 덤덤한 마음으로 보다 불쑥 눈물 한 방울을 찔끔 흘리기도 했었다.
볼 때마다 마음에 드는 씬을 새롭게 발견하고 각각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는 폭이 커지는 것 같다.
어떤 날엔 유지태나 이영애 같은 주연 배우들보다
극 중 상우의 아버지 역할로 나오는 박인환 배우나 고모인 신신애 배우의 마음속에도 잠깐 들어갔다 나왔었다.
이렇게 나이를 먹나 보다. 그저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여겨졌던 인물들의 마음까지 헤아려보게 되는 걸 보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씬은
극 중 인물이 '소리'를 듣기 위해 가만히 귀를 기울인 채 멈춰있는 장면이다.
그곳엔 언제나 바람이 일으키는 작디작은 사건들이 세심하게 담겨있다.
이파리들이 저희들끼리 부딪치며 내는 소리,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지저귀는 소리, 물이 흙이나 돌을 쓰다듬으며 흐르는 소리.
이 모든 사건들이 거기 그곳에서 발생한다. 나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그 무심함 덕분에 나는 이상하게도 되려 안정감을 느낀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자연은 거기에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대나무에 사람들이 새겨둔 낙서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고등학교 때 한자선생님이 커다랗고 거친 글씨체로 칠판에 쓰셨던 말이 생각난다.
무수오지심 비인야(無羞惡之心 非人也)
죽녹원 곳곳에서 무형문화재 선생님들이 작업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참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