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에 대한 고찰
‘안녕’은 ‘편안 안’에 ‘편안할 녕’을 쓴다. 우리나라에서 만날 때나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이다. 인사말로 이 말을 사용하는 걸 보면 우리는 일상에서 편안함을 꽤나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또 다른 사람의 편안함을 빌어주는 것이 예의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내 삶이 편안하길 원한다. 몸도 편안하면 좋겠지만, 몸보다 마음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에게 편안하다는 게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편안한 순간은 언제일까? 우리 집 창밖으로는 나무가 있다. 아침에는 아직 먹이를 찾으러 나서지 않은 새들이 나무에 앉아있다. 그 새들이 얼마나 많고 또 수다스러운지 그들이 지저귀면 도로의 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끄러울 법도 한 새들이 조잘거리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새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한 적도 적지 않다. 조용한 음악이나 소리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게 일반적인데 이상하다. 그때 느끼는 편안함은 무얼까? 그건 아마도 이 세계에 나 말고 다른 생명체들이 힘차게 살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일 거다. 종다양이 사라지고 있는 시기에 인간 말고 다른 동식물들이 살아 숨 쉰다는 것이 나에게 편안함으로 다가왔던 거다. 당장 나의 이익으로 계산하고나 셈해보지 않아도 이 세계를 살아가는 동료가 다양하게 많다는 것이 다행이고, 그 사실을 몸으로 깨달을 때 편안해진다.
또 어제 달을 보며 나누었던 대화에서도 편안함을 느꼈다. 우리는 인간이 과학적인 사고에 매몰되기 전 달을 보며 얼마나 많은 공상과 상상을 했을까 생각했다. 지금은 태양과 달의 위상이 다르지만 옛사람들은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점, 태양에 비해 크기가 매일 달라지는 달이 얼마나 수수께끼였을지 등을 이야기했다. 또 지금은 저 문양이 달의 산과 바다를 뜻한다고 생각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가늠해 보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을, 혹은 세계를 하나의 시각으로 관철시키고 넘어가는 실증적 관점이 아니라,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해 볼 여지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안도했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나는 혼자 살지 않는다. 타인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 즉 타자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것과 함께 살고 있다. 당장 산책을 나가서 길을 걸어보면 그곳엔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열매 등 식물의 흔적들이 있다. 나무와 나무사이를 타고 오르는 청설모도 있고, 작은 새들도 있다. 바위 위에는 햇빛이 아주 작게 내려와 있고, 아래에는 이끼가 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환경이 아니라 세계다. 그 세계를 조금만 더 시간을 들여 들여다본다면 동료들의 세계, 이야기가 있는 세계, 친근한 세계가 있다. 내가 편안하다는 것, 안녕하다는 것은 나를 포함한 이 세계의 안녕을 느끼는 것이다. 또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할 가능성을 발견할 때 나는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고 안녕한 상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