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블루 플라스틱 의자

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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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남해 읍내에는 길을 걷다 심심치 않게 의자를 발견할 수 있다. 의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걷다가 지칠 때 앉기도 하고, 어르신끼리 모여 노닥거릴 때도 쓴다. 어떤 의자는 군에서 설치하기도 하고, 어떤 의자는 어르신이 직접 집에서 남는 의자를 가져온 것 같기도 하다. 남해에 산 지도 5년이 되어 길에서 만나는 의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졌다. 그러다 어제, 남해 대학도서관 근처를 걷다가 노란 오후 햇빛을 받고 있는 빛바랜 틸블루색 플라스틱 의자를 보았다. 항상 거기에는 할머니들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아무도 계시지 않았다. 그 빈자리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우리 할머니를 떠올렸다.


우리 할머니는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 6·25전쟁 때 주민등록 자료가 소실되어,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재신고되었다. 1998년은 내가 중학교를 가는 해였다. 중학교 입학 통지서가 집집이 서면으로 보내졌다. 우리 집에는 우편물이 두 개였다. 하나는 내 것이었고, 또 다른 건 할머니 것이었다. 전산오류로 100살이 많은 할머니가 졸지에 입학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 때 우리 할머니가 나보다 주민등록상으로 100살이 많다는 걸 알았다. 재신고하는 과정에서 실제 나이보다 많게 신고된 거다. 엄마는 할머니가 90쯤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말이 많지 않았다. 우리에게 화를 낸 적도 없다. 평생 화를 내본적 없는 듯한 그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언제나 살짝 웃는 듯한 인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은 나이가 아주 많은 할머니처럼 입술이 안쪽으로 말려들어 갔다.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가 없으셔서 단단한 건 씹지 못하셨다. 참외를 먹으려면 칼로 길게 반을 갈라서, 씨는 숟가락으로 버린다. 그 숟가락으로 참외를 박-박-하고 긁으면 참외가 간 것처럼 긁힌다. 그렇게해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 드셨다.


할머니는 새벽에 일어났다. 일어나면 하는 일중에 하나가 머리를 빗는 일이었다. 방바닥에 거울을 세우고 빗을 꺼낸다. 밝은 대나무를 중앙에 두고 붉은 갈색 빛이 도는 얇은 나무들이 양쪽으로 촘촘히 들어선 참빗으로 머리를 빗었다. 나는 그 빗으로 할머니가 머리를 빗을 때마다 '너무 아플 것 같은데....'하는 생각을 했다. 머리를 빗다가 동백기름을 손바닥에 얼마간 떨어뜨려 비빈 다음에 머리에 바르고 또 빗었다. 그리고는 빗에 끼인 머리카락과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과 손바닥으로 싹싹 쓸어서 어제 쓰고 모아놓은 휴지 한 칸에 잘 싸매 버렸다.


할머니는 집에 잘 계시지 않았다. 우리는 '마실갔다'라고 표현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마실이었는지 모르겠다. 마을회관에 할머니들이 모여 계셨는데, 가끔은 거기에 목침을 베고 누워 계셨다. 아니면 저 마을 아래 연배가 비슷한 할머니 댁에 마실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땅은 아닌, 냇가 옆 남는 땅이나 산에 어디 빌린 땅에 콩이나 고구마 따위를 심고 가꿨다. 주말에는 하얀 털이 보송한, 가짜 보석이 달린 아주 깨끗한 옷을 입고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시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한 봉지에 24개 들어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오셨다. 어디 다녀오셨냐고 물으면 '약장수 구경'이라고 대답하셨다. 누가 할머니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지 않아도 할머니는 어떻게든 가계에 도움이 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친구 집에서 돌다가 집에 오다가 할머니를 보면 할머니는 항상 어딘가에 앉아 계셨다. 마을 어귀, 들깨밭 옆에 커다란 바위 위에도 앉아 계셨고, 저 아래 정자에도 앉아 계셨다. 마을이 그렇게 넓지도 않은데, 나이가 많은 할머니는 잠시 걷는 일에도 숨이 찼던 걸까? 그 틸블루색 플라스틱 의자는 비어 있었지만, 아주 투명하게 우리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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