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궤도를 돌며 숨차게 생각한 것들
퇴사 후 8개월이 지난 요즘. 일 년간 잘 쉬어보고 잘 써 보겠다고 결심했지만, 요즘은 12시 반 기상이 일상이 되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작심 일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8시 반에 일어나 영양제를 챙겨 먹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집 근처에 달릴 수 있는 꽤 넓은 공원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공원은 8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인도와 이어진 입구 쪽에는 여름이면 분수가 나오는 분수 공원이 있고, 분수 공원을 쭉 가로질러 가면 등산로와 이어진 또 하나의 공원이 나온다. 분수 공원이 돌바닥으로 되어 있다면, 깊은 공원은 트랙의 산책길 중앙에 푸른 잔디가 가득해 더 푹신한 봄 내음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평소에는 저녁에 너무 어둡지 않고 적당히 노출된 분수 공원을 달렸지만, 오늘은 모처럼 아침에 나왔겠다 깊은 곳에 있는 잔디 공원의 트랙을 달리기로 했다.
나는 다리가 짧은 탓에 아주 느리게 달린다. 아차, 잔디 공원을 달리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가 달리고 나서야 떠올랐다.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진 트랙에 숨이 가쁘고, 발은 더 느려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과 풍경을 관찰하게 되었다.
앉을 수 있는 휴대용 짐가방 겸 의자에 잠시 앉아 통화하는 사람. 직접 달리는 대신 RC카를 조종하여 온 잔디밭을 누비는 사람. 벤치에 앉아 운동화 끝만 바라보는 사람. 오르막길을 천천히 뒤돌아 걸으며 오르는 사람. 뒷짐을 진 자세가 서로 닮은 노부부. 챙모자에 멜빵바지를 멋지게 차려입고 영차영차 스트레칭하는 사람. 손자를 보듯 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준 사람. 모두 같은 공원 안에 있지만 각자 마음이 가는 곳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습습 후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바쁘게 달렸다. 누가 보면 걷나 싶을 정도의 속도지만, 그것마저 벅찼던 나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누군가에게 쉬운 일이 누군가에겐 벅찬 게 당연하니까요. 요즘은 아디다스 달리기 앱에서 ‘초보자 5km 트레이닝’ 코스를 따른다. 오늘 정해진 루틴은 인터벌 런이다. 20초 빠르게, 20초 걷기를 4번 반복한다. 그리고 1~2분 간격으로 빠르게 달리기, 걷기, 편하게 달리기, 느리게 달리기를 3번 반복하고, 마무리로 5분 느리게 뛰는 트레이닝 코스다.
야외 달리기를 할 때는 하천을 쭉 따라갔다가 목표 거리나 시간의 반절이 지나면 되돌아오는 코스가 가장 재미있지만, 원형 트랙을 달리는 것도 생각보다는 지루하지 않다. 아니, 꽤 신경 쓸 것이 많아 바쁘기까지 하다. 먼저 무언가를 함부로 밟지 않도록 조심한다. 개똥을 밟으면 내 운동화에게, 콩 벌레를 밟으면 콩 벌레의 짧은 인생에게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한 바퀴를 돌 때는 땅을 유심히 보고 나름의 ‘주의 구간’을 설정한다. ‘개똥 주의 구간, 콩 벌레 주의 구간’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주의 구간’은 오늘 설정한다고 해도 내일 또 달라지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또 야외 공공 화장실을 지날 때는 최대한 입으로 숨을 쉬지 않고 코로 숨을 쉬려고 한다. (이 부분은 꽤 반발을 살 것 같은데, 나처럼 코가 괴롭더라도 입으로 더러운 공기의 맛이 느껴지는 것이 더 싫은 소수의 사람이 있음도 존중해주었으면 한다.)
그 밖에도 피어난 꽃이 철쭉인가 진달래인가 도저히 모르겠어서 온갖 풀과 꽃의 이름을 줄줄이 아는 초능력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할매>를 쓴 황석영 작가님은 어떻게 그렇게도 나무와 풀의 이름을 다 알고 묘사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테무에서 물건을 사면 성공률 9할’, ‘책을 빠르게 읽을 수 있음’ 2가지 초능력이 있긴 하다. 이 2가지와 식물의 이름을 아는 초능력을 누가 바꿔준다고 하면 바꿀 건가, 고민하다가 어쩐지 아까워져서 나의 초능력을 좀 더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원성을 자아내는 운명의 장난은 따로 있다. 인터벌 달리기를 할 때 오르막에서는 꼭 달리기 코스가, 내리막에서는 걷기를 배정해 준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썰매장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오르는 길은 에베레스트 같고 내려오는 짜릿한 시간은 1초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적절한 안배였을까. 내려오기를 천천히 내려오니 오르막 달릴 힘이 거짓말처럼 생겼다. 그리고 몇 바퀴 돌다 보니 오르막길을 천천히 달리며 시원한 바람을 맞는 순간도 생겼다. 빙빙 돌고 도는 원형의 트랙, 그 궤도는 똑같아도, 조금씩 다르게 변주하는 나의 속도가 반복되는 트랙 안의 다른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사실 달리기를 한 이유도, 오늘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간 이유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가 직업정신을 동경해서다. 하루키는 매일 4,000자를 쓰고, 매일 10km를 달린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오늘 아침 나는 작심 일일 차 모닝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달리기를 할 때 본 사람과 풍경을 쓰고 싶은데 힘이 없다.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왜 이다지도 많은 힘이 필요한 걸까. 하지만 이런 힘이 드는 일을 나는 계속하고 싶다. 그래도 역시 하고 싶고,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오늘, 궤도를 돌며 숨차게 생각한 것들을 기억해야겠다. 똥 피하기, 나의 초능력 소중히 하기, 나의 속도로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