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심신이 지쳐 힘들던 시기, 우연히 칼 융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책을 읽게 되었다.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일화가 있다. 융은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며 종교적 분위기 속에 성장했다. 어느 날, 그는 학교를 마친 뒤 대성당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순간 하늘 너머 황금 보좌에 앉은 하느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숨이 막히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어떤 끔찍한 생각이 떠오르려는 것을 감지했고, 그 생각을 어떻게든 막으려 애썼다. “제발 그것만은 생각하지 마라. 제발 그것만은...” 스스로에게 되뇌며, 그는 그 생각이 의식 위로 떠오르지 않게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사흘째 되는 밤, 그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고, 마침내 묻는다.
‘이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는 알 수 없는 내면의 힘이 자신을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그 금지된 생각을 허용한다. 대성당 위, 푸른 하늘 아래, 황금 보좌에 앉은 하느님 위로 거대한 똥덩어리가 떨어져 지붕과 벽을 산산조각 낸다.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 그는 놀랍게도 저주가 아닌 해방감을 경험했다. 압도적인 안도와 자유, 축복과 눈물. 그는 울면서 감사했다.
이 경험을 읽으며, 나 역시 깨달았다. 나도 도덕적 가치판단 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사회적 규범에 어긋난다고, 부끄럽다고, 두렵다고 여겨졌던 나의 어떤 면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었고, 그것들이 바로 내 그림자라는 사실을.
융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감정, 충동, 본능, 기억 등을 ‘그림자’라 불렀다. 그것은 단지 부정적이고 나쁜 것만이 아니라, 억눌린 창조성과 본능, 열정과 직관력까지 포함한 우리의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억눌러왔을까. 나 역시 융처럼,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한 장면을 억누르다 결국 그것을 허용했을 때,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언젠가 따로 꺼내보고 싶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을 ‘하면 안 되는 것’이라며 밀쳐냈을까.
그리고 그 억눌림이 우리 삶을 어떻게 움켜쥐고 있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융이 경험한 그 해방의 순간은 단지 하나의 생각을 허용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가 얼마나 해방감과 자유를 선사했을까!
나 또한,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내 안의 ‘허용되지 않은 생각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허용’은 곧 자신을 받아들이는 첫걸음이고, 그 순간부터 진짜 변화가 시작되지는 않을까?
온전한 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이 글은 어떤 결론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융과의 만남, 그리고 나의 그림자를 자각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며, 앞으로 ‘그림자’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꺼내 본 서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