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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서울

우리는 누구나 문지방에 서 있는 지도 모른다.

by 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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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서울>은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오랫동안 주연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연기력 보다는 귀여운 이미지로 사랑 받고 있는 박보영과 이제 막 주목 받기 시작한 박진영이 제대하자마자 선택한 첫 드라마란 타이틀은 크게 주목 받지 못 했다. 그동안 쌍둥이의 삶을 다룬 드라마는 많았고 그런 설정은 이미 클리셰가 되어 버렸다.


드라마는 끝났고 그럼에도 <미지의 서울> 대본이 서점가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고 있고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미지와 미래, 두 쌍둥이 자매의 삶은 다른 듯 보이지만, 우리의 삶과, 아니 상처와 닮아 있어서 멈추어 서서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 지점에서 <미지의 서울>이 사람들을 끌어들인 듯하다.


언니 미래와 동생 미지의 삶은 우리의 예상대로다. 반대다. 언니는 공기업을 다니며 잘나가고 있고 미지는 시골에서 일당 알바를 하며 산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개천에서 용난 시골 마을 출신 변호사 호수가 있다. 시골 마을 알바생으로 사는 삶을 숙명처럼 여기며 사는 미지는 서울 공기업 다니는 언니 미래에게 불만이 많다. 공기업을 다니며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 할머니를 나몰라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가 잘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힘들다고 토로하는 미래에게 자신도 참고 사니, 너도 참고 살라고 말하던 미지. 카페에서 갑자기 사라진 미래를 찾아 집에 간 미지는 그곳에서 죽음을 택하려던 미래를 발견한다. 떨어지는 미래의 손을 잡은 채, 함께 떨어지는 미지와 미래. 다행히도 두 사람은 무사했지만, 그런 선택을 한 미래 때문에 미지는 패닉 상태가 된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한다. “내가 너가 될게. 너는 내가 돼.”


우린 누구나 한 번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미지의 서울>은 말도 안 되게 그런 판타지에서 시작한다. 드라마 오프닝에서 카메라에 걸렸던 <왕자와 거지>란 이야기 속 왕자와 거지는 판타지를 꿈꾸며 역할 바꾸기를 한다. 하지만 미래와 미지의 역할 바꾸기는 절실함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라 엄마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는 설정과 더불어 섬세하고 촘촘한 연출로 인해 우리는 미지와 미래의 역할극에 스며들게 된다. 사내 고발로 괴로워하던 선배를 돕겠다는 선의로 용기있게 나선 미래에게 돌아온 건, 직장내 괴롭힘이었다.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버티던 미래 대신 들어간 미지는, 동료들의 외면에도 눈치를 보지 않고 퇴근 시간 6시에 맞춰 가장 먼저 사무실을 나가는 모습으로 웃음과 통쾌함을 준다. 그리고 자전거 타기에 서툴기만 한 미래는 시골 생활이 낯설기만 하다.


제목 <미지의 서울>처럼 이 작품의 주인공은 단연코 미지다. 미지는 구호처럼 외치는 말이 있다. ‘어제는 지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지만 과거에 연연하며 후회하고 내일을 걱정하며, 오늘 살아내는 것을 버거워한다. 드라마 초반의 전개를 보면, 씩씩하고 밝으며 따뜻한 미지는 주변 사람을 챙기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미지는 누구보다 깊게 상처를 안고 있다. 너무 깊게 봉인해 버려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아프지만 맨날 1등만 하던 언니 미래에게 가려질 수밖에 없었던 미지가, 하늘을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육상 선수의 꿈이 사고로 날아갔을 때, 미지의 날개가 꺾였다. 다시 일어서지 못할 만큼 아주 깊은 상처가 났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미지의 상처를 알아보지 못 했다. 미지는 숨기며 살았다. 그게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의도치 않게 시작한 서울살이를 하며, 미지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한다. 물론 자기가 부정하고 싶은 바보같은 모습에 찔리며 아파하면서.


미래는 억울하다. 미지는 미래가 모든 걸 누리고 모든 걸 차지한 것처럼 말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살림살이를 하는 엄마의 기대는 천근만근이지만 티를 낼 수가 없다. 자신 뒷바라지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알았음으로. 고시공부에 실패하고 들어간 공기업, 미래는 자신을 루저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미래는 가장이므로. 미래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미지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자전거를 타고 시골을 종횡무진 다니며 할 말 못 할 말을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동생이. 미래도 자신의 상처만 봤지 동생 미지의 상처는 보지 못했다. 미래는 가짜 미지의 삶을 살면서 심심한 자유를 만끽한다.


호수의 삶은 상처투성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를 데려온 아빠가 불만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엄마를 찾아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 함께 차를 탔던 아빠는 돌아가시고 호수만 살아남는다. 온 몸이 부서져 누워있는 호수에게 남아 있는 건 낯선 새엄마뿐이다. 자신을 짐덩이취급하는 어른들 속에서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새엄마가 고맙다. 반복되는 수술에도 호수의 몸 한 쪽은 망가져 버렸다. 한 쪽 귀는 들리지 않았고 사고 났을 때 불에 던져진 몸은 살이 녹아내려 쭈글거리며, 지문처럼 몸에 새겨졌다. 호수는 이후로 반바지나 반팔을 입지 못한다. 더 큰 상처는 몸에 난 상처가 아니라 세상과 문을 닫아버린 호수의 마음이다.


<미지의 서울>에 나오는 사람들은 상처가 많다. 미지와 미래, 호수 이외에도 농장주 한세진, 호수 엄마, 미지 엄마, 미래의 회사 선배, 로사 아줌마 등등. 그들에게는 상처가 있다는 공통점 말고 다른 공통점이 있다. 상처를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그들은 상처를 외면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지 알지 못한 채 고통을 숨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들의 상처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터트린다. 상처는 아프고 쓰리다. 마주하기 두렵고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상처가 터져 피가 나고 고름이 나와야 딱쟁이가 지고 딱쟁이가 스스로 떨어질 때 쯤 상처가 아문다.


미래는 내부 고발 후, 직장 내 괴롭힘을 참지 못해 사표를 내고 자기 방에 숨은 선배의 문 앞에서 괜찮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미지는 꿈이 꺽인 후, 오랜 시간 방 안에 숨어 세상과 벽을 쌓고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상처주던 자신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상처를 내며 담을 쌓는 호수에게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미지의 엄마는 할머니가 죽음의 문턱에 닿았을 때에야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음을 안다. 로사 아줌마는 비밀을 숨기고 세상 사람들과 싸우며 살다 미지의 따뜻함과 진심에 손을 내민다. 어제는 지났고 오늘을 기어이 잘 살아낸 이들의 내일이, 따뜻하다.


혹자는 박보영에게 차력쇼를 한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1인 4역을 한다고 했다. 미래와 미지, 미래인 척하는 미지, 미지인 척하는 미래. 암튼 박보영은 귀여움의 대명사에서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한 사람의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꿈 속에서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 될 장면이 아닌가 싶다. 박진영은 군대를 제대한 후, 연기가 더 깊어졌다. <유미의 세포들> 이후로 조금씩 인기몰이를 하던 박진영은 <미지의 서울> 이후로 더 폭넓은 연기를 보여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미지는 문지방에 서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한 발 내디딘 세상에서 받을 상처가 두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문지방에 서서 지금도 머뭇거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 상처를 향해 한 발 내디뎌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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