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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노라>

아노라의 눈빛이, 다했다.

by 양경


영화 ‘아노라’는 아노라의 눈빛이, 다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클럽 안에서 스트리퍼들의 쇼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손님 맞이에 바쁜 아노라의 모습을 좇는다. 이게 션 베이커 영화라구? 션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같은 감독 작품이 맞나 의심을 하게 된다. 물론 <아노라>가 수많은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작품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여우주연상, 캐스팅상), 미국 작가 조합상(각본상), 미국 감독 조합상(감독상(영화부문)),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작품상),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버추오소스상, 아웃스탠딩 감독상), 런던 비평가 협회상(신인배우상), LA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주연상, 조연상), 뉴욕 비평가 협회상(각본상), 칸영화제(황금종려상)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 션 베이커에게 이렇게 많은 상을 안겨준 작품은 없다. 앞으로 더 받을 상이 남아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왜?란 질문과 함께 영화에 집중하게 된다.


스트리퍼인 애니는 자기 직업에 당당하며, 솔직하고 불의에 참지 않는, 불같은 성격이다. 그런 애니에게 제안이 온다. 러시아말을 할 줄 아는 애니에게 러시아 부자집 도련님을 맞으란다. 하얀 피부에 마르고 껑충 키가 큰 러시아 도련님(이반)이 애니는 마음에 든다. 애니는 이반의 핸드폰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찍어주며, 클럽 밖에서 신나는 돈벌이를 한다. 이런 애니에게 일주일 동안 자신과 함께 있자고 제안하는 이반. 늘 기대 이상의 현금 캐시를 애니에게 쥐어주는 이반의 제안에, 애니의 고민은 길지 않다. 이반을 통해 화려한 세계를 맛보는 애니는 황홀하고 흥분된다. 이반이 좋아진다. 그리고 라스베가스에서, 이반은 애니에게 결혼하자고 하고 이반과 애니는 결혼을 서약한다. 꿈같은 시간을 보내는 애니, 하지만 악몽이 시작된다. 이반의 후견자 토로스에게 이반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고, 영아 세례식에 참석 중이던 토레스는 성스러운 예식을 뒤로 하고 이반에게 달려간다. 토로스의 똘마니 이고르와 가닉은 이반을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역부족이다. 게다가 이반은 애니를 버려둔 채, 혼자만 도망간다. 이런 현실을 믿을 수 없는 애니는 자신에게 매춘부라고 부르는 가닉의 코를 부러뜨린다. 그리고 애니와 토로스, 이고르, 가닉 네 사람은 철부지 이반을 찾아 나선다.


스트립쇼 클럽 밖의 애니는 누가 봐도 스트리퍼라는 사실을 눈치 채기 어렵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초췌한 모습은 힘겹게 살아가는 여느 20대 여자의 모습이다. 클럽 안에서 완벽해보이던 스트리퍼 애니는, 클럽을 빠져 나오는 순간 일과 일상을 분리한다. 이반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하며, 파티를 즐기는 애니에게 이반은 귀여운 호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라스베가스에서 결혼을 하는 이반과 애니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벌써 둘의 끝을 예견 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애니도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이반은 양아치고 이반이 애니와 결혼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기분에 취해 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애니가 이반이 사주는 다이아 반지에, 밍크코트를 두르고 잠깐의 부부 놀이를 즐기는 줄 알았다. 하지만 토로스의 똘마니, 이고르와 가닉이 등장하며 헷갈리기 시작한다. 가닉의 코를 부러뜨리고 손발이 묶인 채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자신을 버려두고, 이반이 혼자 도망갔음에도 애니는 이반을, 믿는다. 토로스가 오자, 이고르, 가닉과 함께 애니의 추격은 시작된다. 애니는 이반이 자신의 존재를 보증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토레스는 이반은 철부지라고, 이반이 저지른 수많은 사건 사고를 해결하는데 지쳤다고, 이 결혼도 그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애니는 믿지 않는다. 그런 애니에게 스카프를 건네주며 안쓰럽게 바라보는 사람은 이고르 뿐이다. 애니 역을 맡은 마이키 메디슨은 애니의 불안과 간절함을 눈빛에 담는다. 애니가 말하지 않아도 애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래서 애니처럼 혹시 이반의 진심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결말에 동참하게 된다. 애니가 너무 춥고 외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찾은 이반, 이반은 먼 길을 날아온 엄마 앞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애니는 이반에게 소리 지르지만 이반은 이혼 취소를 위해 라스베가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무기력하게 오른다. 애니는 그런 이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애니는 무너진다.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던 애니가, 조용해진다. 슬픔과 절망과 배신감과 자책감과 분노를 담은 눈빛, 아니 그 모든 것이 탈색된 공허한 눈빛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거기에서, 애니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창녀 노릇으로 돈을 벌지만, 딸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짜였던 무니의 엄마와 겹쳐진다. 이반과의 결혼이 진짜라고 믿었던 애니의 모습은, 집 없이 모텔에서 살면서도 꿈을 꾸던 무니의 순수한 미소와 겹쳐진다. 무니는 웃지만, 우리는 울었다. 애니의, 아니 아노라의 공허한 눈빛에 눈물이 났다. 그래서 온통 파스텔톤으로 가득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 포스터와 옅은 핑크와 블루 바탕에 남녀가 부둥키고 있는 <아노라>의 포스터가 다른 듯 비슷해 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애니를 가장 따뜻하게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던 이고르에게 애니는 진짜 자신의 이름, '아노라'를 가르쳐준다. 이고르는 ‘아노라’란 이름이 예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애니’란 이름으로 살아야했던 애니는 ‘아노라’란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어쩌면 아노라는 '애니'란 이름 속에 아노라를 숨기고 살았는 지도 모른다. 순수하고 여리디여린,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이름, 아노라. 애니가 앞으로는 ‘아노라’란 이름으로 살 수 있을까? 왠지 앞으로도 '아노라' 대신 ‘애니’란 이름으로 살게 될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애니에게 '아노라'란 이름을 되찾아주고 싶은 영화,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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