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숲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1998년, 배우 한석규와 스님이 담양 숲을 나란히 걸으며 흘러나오던 광고문구다.
50분을 하늘을 날아 제주에 왔다. 바닷가를 걸었다. 파도 소리가 났다. 철썩. 처얼썩. 큰 소리였지만 시끄럽지가 않았다. 텔레비전 광고 속 음향효과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났다. 필터링되지 않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청량하다. 기분탓일까?
도시에서는 수많은 소음과 마주하게 된다. 차소리, 공사하는 소리, 쿵쿵 낮은 천장을 울리는 층간 소음들...... 언제부턴가 머리맡에 놓여 있는 3M 귀마개는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귀마개 없이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정수기 얼음 떨어지는 소리 같은 미세한 소리에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귀가 돼버리고 말았다.
사려니숲을 걸었다. 빼곡한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이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나무 냄새가 났다. 바람 냄새가 났다. 흙을 밟으며 킁킁 냄새나는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를 향한 걸음이었다. 목적지를 향한 길이었다. 아직 한참이나 남은.
도심에서라면 습관처럼 꺼내 들었을 에어팟이 가방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풀들이 바람에 스쳐 풀벌레처럼 울었다. 에어팟에서 들리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르는 낯선 이와 눈인사를 나누며 발랄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한참을 내 발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간간히 보이던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풍경을 담기 위해 잠시 멈췄던 것이 간격을 만들었나 보다. 다시 걷기 시작하니, 멀리서 천천히 힘겹게 산을 오르는 어르신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생수를 든 채, 오르막길을 오르시는 발걸음에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 분이 검지 한 마디 만큼 작아졌을 때,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찰칵.찰칵.찰칵. 무음이라 소리는 나지 않았다. 점처럼 작아지는 어르신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고독이라 제목을 붙였다. 어쩌면 누군가 그 시간, 내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또 다른 제목을 붙였을 지도.
일체의 기계음이 소등된 공간 속에서
온전히 외로워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