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앙’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추앙’이란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이란 뜻이다. <나의 해방 일지>란 드라마를 보면서, 염미정(김지원)의 입을 통해 ‘추앙’이란 단어가 나오는 순간, 드라마를 그만 봐야하나? 했다.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란 작품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드라마를 보며 같은 작가가 쓴 게 맞나싶었다. ‘추앙’이라니. 새삼 김지원이란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란 생각이 든다. ‘추앙’이란 불편한 단어를 덜 불편하게 전달하니 말이다. 반면에 손석구의 입에서 나오는 추앙은 남의 옷을 입은 듯 ‘어색’하다. 그래서 너무 궁금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추앙’이 유행처럼 떠돌아다닌 이유를. 나한테는 <파리의 연인>의 이동건 대사 ‘내 안에 너 있다.’와 <상속자들>에서 김우빈의 대사 ‘나 너 좋아하냐?’는 나의 손, 발을 오그라들게 했던 순간 중 하나다. 김은숙이 대사발로 인기를 얻은 작가임을 고려할 때, 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열광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해영 작가 드라마에 ‘추앙’이라니. 아마 많은 사람들이 ‘추앙’이란 낱말을 부지런히 찾아보았을 것이다. 혹시 내가 아는 그 ‘추앙’이 아닌가 하는. 모르겠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빠져 있고 캐릭터를 사랑하니까. 외롭고 공허하며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살아가는 미정이한테 ‘추앙’은 필요충분 조건인지도. 하지만 요새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손석구의 로맨스에 등장하는 단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추앙’ 받았을까?
이상하게 ‘추앙’이란 말은 그 말을 꺼낸 염미정 보다는 그냥 ‘추앙’ 자체로 떠돈다. 캐릭터와 유리된 채로. 염미정이 굳이 왜 어색하고 낯설며 생경한 ‘추앙’이란 말을 꺼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얘깃거리로, 소비꺼리로 ‘추앙’을 ‘추앙’하고 있는 것 같다. 손석구란 이름과 함께. 그래서 초반에 주목받지 못 했던 <나의 해방일지>는 손석구가 화제성 4주 연속 1위를 수성하며, ‘추앙’이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나의 해방일지>는 ‘추앙’과 손석구 말고 미덕이 많은 드라마다. 물론 계약직 염미정을 빼고 남들 받는 만큼은 받고 직장 생활을 하는 염기정과 염창희가 왜 그런 촌구석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렇게 힘겨워하며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는지, 서울살이하는 경기도민으로서 개연성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설정임에도 말이다.
우선 캐릭터의 신선함이다. 위풍당당하고 이기적이며 거칠 것이 없고 자기 사랑에만 진심인 염기정은 엽기 발랄하다. 마치 <엽기적인 그녀> 속 전지현의 30대 버전이랄까? 골 때리게 사랑스럽다. 그리고 세상 찌질 하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염창희. 구씨가 자신의 차 롤스로이스를 보여주는 순간, 사랑한다고 구씨에게 날아가 안기는 염창희의 모습은 에릭에게 사랑을 구걸하던 오해영의 찌질함에서 진화된 어여쁜 캐릭터다.
또 하나는 드라마가 선사하는 판타지다. 구씨가 100m 전력 질주 후 도움 닫기로 날아오른 장면은 압권이다. 영화 <빅 피쉬>에서 병상에 누운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허풍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이, 아버지 장례식에 진짜로 참석한 아버지의 허풍을 눈으로 확인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처럼. 우리는 지금 모두 어쩌면 구씨처럼 하늘을 나는 도움닫기를 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상에서, 그런 판타지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 지도.
엄마가 죽었다. 염기정의, 염창희의, 염미정의, 그리고 우리의 엄마였을지도 모르는. 엄마의 죽음은 드라마들이 흔히 범하는 클리셰에서 벗어난다. 어떤 개연성도 없다. 우리는 드라마 속에서 늘 개연성 있는 죽음을 엿보며 고개를 끄덕여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개연성 없는 죽음을 목격한다. 그런 죽음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진다. 갑작스러운 죽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진다. 드라마가 깊어지는 순간이다.
당혹스러움은, 배신감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나? 사고처럼? 이 사고를 주인공들은 어떻게 이겨낼까? 이겨냈으면 좋겠다. 해방됐으면 좋겠다. 나도, 해방되고 싶다. 해방됐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의 해방일지>가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