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헤겔

by 사람

"평화시일수록 시민 생활은 더욱 신장되면서 모든 영역에서 저마다 둥지를 틀고 들어앉게 되는데,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인간을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함으로써 그의 분파 근성을 더 완고하고 경직되게 만든다. 말하자면, 건강에는 신체 전체의 통일성이 필요한데, 이때 만약 모든 부분이 제각기 자기 안에서 굳어버리면 죽음이 도래하는 것이다. 흔히 영구평화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고 하면서 요구되곤 한다. 이러한 뜻에서 칸트는 국가 간의 분쟁을 조정할 군주 동맹을 제안했으며 신성동맹도 거의 이런 기구로 짜일 참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개체이며, 개체성에는 본질적으로 부정의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록 다수의 국가가 하나의 가족으로 꾸며진다고 헤도 이러한 결합체는 개체성을 지닌 채 자기에 대한 대립물을 조성하면서 민족은 강력해질 뿐만 아니라, 내분에 휩싸여 있는 국민이라면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국내의 평온을 얻게 된다. (...) 우리는 그토록 자주 설교하는 단상에서 이 세상의 사물은 안전하지 않고 허망하며 무상하다고 논하는 것을 들어오고 있는데, 이때 아무리 그 설교에 감화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누구나 '그래도 내 것만은 놓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일단 이 안전하지 않다는 말이 번뜩이는 칼을 앞세운 기마병의 실제 모습으로 심각성을 드러낼 때는 온갖 예언 투의 말로 그토록 심금을 울리던 설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침략자를 저주하는 데 열을 올린다."


-법철학, 임석진 옮김, p. 566-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