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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네 Nov 19. 2016

그 남자가 살던 집.

외로움의 흔적들




"야윈 허리춤에 한주먹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살이 빠져 있는 그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나에게 명품백 하나 없으면 어떠랴 이렇게 따뜻한 당신이 있는데..."




밤 11시가 되어서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에 도착했다. 열흘 동안 비워 두었던 집에는 싸구려 섬유 유연제 냄새와 새로 뜯은 듯한 방향제 냄새가 가득했다. 꺼놓지 않았던 라디에이터의 뜨거운 온기와 섞여 있는 널브러진 그의 옷가지들, 사용하고 그냥 쌓아놓은 싱크대의 그릇들 때문에 더욱 머리가 아팠다. 냄새에 민감한 나를 위한 배려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리되지 않은 그의 집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먼저 들어가 씻으라 말하고 어수선한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독한 방향제 냄새는 그가 9개월 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날 때 가져갔다가, 아끼고 아껴 내가 오는 날에 맞춰 준비해 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곳에서 세 번 이사를 하는 동안 고이 모셔놨다가 그 투박한 손으로 리본까지 여며 가며 정성껏 매달아 놓은 모습을 상상하니 뭉클했다. 그의 성격 대로라면 위치까지 고민했을 것이다. 향기가 따뜻해졌다.







가져온 인스턴트 음식을 정리하는데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싱크대 벽면에 붙여 놓은 포스트잇에 그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날짜별로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얼마나 바빴는지 알고 있었다. 싱크대 가득 설거지를 못할 정도로, 건조대에 걸려있는 빨래를 두고 한국에 바로 들어와야 할 정도로, 바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건조대 위에 속옷은 그냥 두더라도 그리움은 그냥 둘 수 없었나 보다. 미안하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 솟구쳤다. 야윈 허리춤에 한주먹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살이 빠져 있는 그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는 사실은 저 하얀 벽을 다 채우고 싶었었다고 말하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에게 명품백 하나 없으면 어떠랴 이렇게 따뜻한 당신이 있는데...



 




남편은 매일 밤 이곳에 앉아 외로움을 달랬다고 말했다. 혼자 술도 마시고 음악도 들으며 그리움을 삭혀 나갔다고... 첫 날밤인데도 저 차갑고 쓸쓸한 길을 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집으로 이사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회식 핑계 삼아 술자리를 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저녁 혼자 있는 시간에도 저것들의 힘을 빌려야 했었나 보다.







제 역할이나 할까 싶은 삐그덕 거리는 낡은 공간에 위태롭게 쓰러질 것만 같았던 남편이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퇴근길 두껍게 얼어버린 길을 달려온다고 말했다. 불 켜진 집에 내가 있는 게 좋다고 말해주는 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우리에게 새로운 저녁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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