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네 Nov 21. 2016

새로 생긴 하루.

낯선 시간



"이제 하루 일과라는 것이 무의미 해졌다. 오늘 당장 해야만 하는 일로 가득했던 노트에는 더 이상 채울 글자가 없다."




오전 8시가 되어도 해는 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6월에 방문했을 때에는 오후 8시가 되어서도 해가 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어쩌면 낮과 밤만 존재하는 동화 속 나라는 아닐까. 그러나 아쉽게도 도시에 깔려 있는 어둠은 생각처럼 낭만적이 지만은 않다. 2008년도에 개봉했던 영화 "30 days of night" 가 생각나는 것은 아직 이 도시가 낯설어서 일까. (해가 뜨기 전 D-30. 북아메리카 최북단 도시인 알래스카 배로우는 매년 겨울이면 30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 어둠의 도시에 나타난 좀비에게서 가족과 주민들을 지켜내는 조시 하트넷의 영화.)









한 밤중 공항에 도착했던 그 날부터 하루도 눈이 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2차선 도로는 차선이 보이지 않아 1차선 도로가 된 지 오래다. 눈이 내린 도시에 제일 분주한 이는 제 가게 앞의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상점의 주인들이다. 







6시에 일어나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면 그렇게도 원하던 혼자의 시간이 온다. 유심이 바뀐 휴대폰에는 광고 전화도 업무전화도 연락 올 일이 없고, 이 도시 이 거리 하물며 이 건물 안에도 나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조금은 두려운 일이지만 이런 해방감이 또 있을까. 이제 하루 일과라는 것이 무의미 해졌다. 오늘 당장 해야만 하는 일로 가득했던 노트에는 더 이상 채울 글자가 없다.







항상 해오던 일이 사라졌을 때의 공허함은 멈춰 있는 시간 같이 텅 비어 있었다. 인적이 드문 낡은 도시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서른다섯 해 만에 찾아온 진짜 자유가 두려웠다. 내가 가져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새로 만들게 될 추억보다도 지금 이 텅 빈 시간일 것이다. 마치 그 시간은 며칠 새 눈이 나빠진 건가 싶을 정도로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하고 뿌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풍경 같았다.







1km를 벗어나지 못하는 산책을 반복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장을 보았다. 낯선 환경에서는 도전보다는 신중을 선택하게 되어 있고 어떤 맛일지 아는 익숙한 재료들로 손이 간다. 내일이 되면 오지 않는 오늘의 저녁을 나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생각이 없는 오후가 이어지면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나 아직 읽는 법 조차 모르는 러시아어 까막눈은 여전히 실수 투성이다. 냉장고에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큰 물을 사는 것 보다도 그토록 싫어하는 "미네랄워터"라는 글 조차 읽을 수 없게 되니 이 도시에 혼자 있구나 실감하게 된다.





혼자 마주 하던 하루가 지나고 나면 원하든 원치 않든 의지해야 할 사람이 돌아온다. 나보다 먼저 이 시간들을 지나갔을 이를 생각하면 조금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어둠의 무게만큼이나 고된 하루를 견녀내고 식탁에 앉은 그를 보니 고마운 마음이 크고, 이 시간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WAY TO HAPPINESS"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남자가 살던 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