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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네 Dec 01. 2016

할 일 없는 자의 순간의 기록들

여행서에는 없는 이야기. 



"모든 것에는 동전 같은 앞뒤가 존재 하기 마련이다. 사람도 그러하고 사물도 그러하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도시의 뒷면에도 슬픔과 아픔은 존재했다"




아침에 눈을 떠도 딱히 할 일이 없다. 사실 그 시간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내겐 있지만 하루 6시간 정도밖에 밝은 순간이 없으니 목적 없는 산책이 내 일상에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남편을 일터로 보내고 나면 여전히 어둑한 거리가 밝아지기를 기다린다. 검은색 도시가 잿빛이 될 때쯤 늦은 아침을 한 끼 하고 딱히 갈 곳도 없는 걸음을 재촉한다.













습관이라면 습관이다. 늘 남의 집 담벼락 안이 궁금하고 옆집의 불 켜진 창가의 향수병이 궁금했다. 이유 없이 놓인 것들은 없기에 제 아무리 사물이라도 왜 그곳에 있는지 언제나 궁금하다. 누군가 나의 사진첩을 본다면 쓸데없이 용량만 차지하는 무의미한 것들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 의자도 빗자루도 왜 저기에 있을까 호기심을 자극했다. 언젠가 겨울이 되어 이곳에 오게 된다면 처마 밑을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었다. 눈이 잔뜩 내린 오래된 건물의 파사드나 테라스가 무너질 수도 있고 얼어붙은 고드름이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설마 하니 고드름에 맞아 생을 마감할까 싶었지만 실제로 눈이 내리고 거리가 얼기 시작하면 건물의 곳곳에 안전을 위해 길을 봉쇄해 놓는 장치를 쉽게 볼 수 있다. 역시나 모든 것에는 사연이 있다.











따뜻한 6월  예술가들과 관광객들로 넘치던 아니치코프의 다리는 어쩐지 쓸쓸하다. 여행자에게 폰타 강 다리 위에 화가 할아버지와 모스크바 역의 거리의 악사는 낭만스러울 수도 있지만 영하 6도의 차가운 공기에 낡은 겉옷과 오래된 화구통에 의지한 늙은 화가, 차가워진 금관악기를 만져야 하는 악사에게는 오늘도 가난한 하루다.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미술관이 즐비하고 그림을 살 수 있는 장소들도 풍족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도시의 예술가들은 삶이 고단하다.







모든 것에는 동전 같은 앞뒤가 존재 하기 마련이다. 사람도 그러하고 사물도 그러하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도시의 뒷면에도 슬픔과 아픔은 존재했다. 넵스키 대로의 랜드마크 같은 웅장한 서점을 배경으로 추위에 떨며 오늘 또 한 끼를 고민해야 하는 노인은 이 겨울이 고단하다. 이 순간이 아이러니했다. 아름답고 거대한 카잔 성당의 기둥 뒤에 숨은 슬프고 외로운 풍경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침에는 전날 밤 가시지 않은 취기가 가득하다.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적어도 10개 이상의 술병들이 발견되곤 한다. 하물며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술병과 맥도널드의 콜라병이 전쟁의 승전 물처럼 자랑스럽데 꽂혀 있다. 나는 어제의 내가 뿌듯하다는 듯이...







이곳의 여자들은 꽃 선물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꽃가게는 어느 길을 가든 슈퍼마켓만큼 자주 볼 수 있고 꽃을 들고 있는 남자는 술병을 든 남자보다 더 자주 볼 수 있다. 사진을 담을 수도 없이 빠르게 걷던 어린 청년의 마음이 궁금했다. 홍조 띤 얼굴은 설레어 보였고 빠른 발걸음은 행복해 보였다. 고백하러 가는 길이라면 부디 성공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외출할 때 모자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 서울보다 저기압에 낮은  온도를 견뎌내려면 꼭 모자를 써서 체온 유지를 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거리에 나가면 눈과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은 많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을 없을 정도다. 멋쟁이 할머니는 빨간 모자와 하늘색 레이스 스커트로 한껏 힘을 주었다. 역시나 예쁘게 하고 사뿐히 걷는 당신이, 가는 길이 나는 궁금합니다.










가끔은 버린 것인지 잠시 놓아둔 것인지 헷갈리는 것들이 있다. 오래된 LP판은 항상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문을 닫은 지 오래된 것 같지만 누군가 매일 드나드는 곳 같은 간판 없는 카페에 커피를 파는지 술을 파는지 알 수가 없다. 대충 버려져 있는 거 같아도 마치 저 자리의 주인인 양 놓여 있는 모습에 매번 창 안쪽을 훔쳐보곤 한다. 젖은 벙어리장갑이 마르긴 할까 싶을 정도로 날이 춥고 해는 없지만 개의치 않는가 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해가 질 무렵인 4시경이다. 옅게 도시를 밝히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면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그림자처럼  서 있는 모습이 좋다. 어딘지 차가워 보이면서도 실타래처럼 엮여있는 잔가지들이 여름의 나무보다 이상하게 풍요로워 보였다. 마치 이 도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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