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로미 이야기
인생이 휘청하는 시기가, 그런 순간이 있다.
다정하고 평온하던 일상이 하루아침에 표정을 바꿔버려 막막해지는 그런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 다 멈추고 어딘가로 도망 가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던, 가면을 쓴 채 꾸역꾸역 일상을 이어가야만 했던 그런 시기의 어느 날 이었다.
남편과 동네 카페의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뭔가 기쁜 일을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양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고 나면 다 운명 같은 일이다.
마침 그날 집 근처 바스티유 광장에서는 동물보호협회의 대대적인 유기견, 유기묘 입양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행사장은 동물을 사랑하는 프랑스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우리는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가며 "전시된" 고양이들을 구경했다. 고양이들은 커다란 투명 상자에 한 마리씩 앉아 놀고 있었고, 그 앞에는 각자의 이름과 성격, 나이, 입양시 유의점(몇 평 이상의 큰 집이나 마당이 필요한 고양이, 다른 고양이와 동거 가능성 등)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삶을 즐기는 느긋한 성격"의 고양이는 내내 그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나몰라라 낮잠을 자고 있었고, "반드시 함께 입양되어야 하는" 아기 고양이 형제는 그 와중에도 개구지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양이들은 이미 입양이 되어 빈 상자가 대부분이었고, 남아 있는 동물들은 며칠 연속의 행사에 지쳐 심드렁하게 누워있었다.
로미를 만났다.
실밥이 다 터져나간 장난감 인형을 혼자서 던지고 받으며 고개를 숙인 채 놀고 있었다. 2살 반. 고양이로서는 성년의 나이인데 아기처럼 몸집이 너무 작았다. 왠지 어딜 가도 서열에서 밀릴 것 같은 작은 얼굴. 손가락을 내밀자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깨물기부터 한다. 줄은 뒤로도 계속 이어져 있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주변의 반응은 온통 걱정뿐이었다.
"너희들 알레르기 있잖아" 혹은 "아이는 언제 낳을 거니?"
사실 알레르기 반응은 생각보다 심했다. 공기청정기를 샀고, 특수 필터가 달린 청소기를 샀다. 하루 두 번의 청소가 시작됐고, 알레르기 검사와 이에 따른 치료도 시작했다.
쓰다듬으려 손을 갖다 대면 몇 초 지나지 않아 손을 깨물어댔고, 어디선가 숨어있다가 달려들어 발을 깨물기도 여러 번이었다. 발톱은 절대 드러내지 않았으나 자주 물어뜯었다. 그 나름의 노는 방식이라는 걸,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강도 조절을 잘 못할 뿐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는 반복적으로 교육을 했고 빠르게 좋아졌다.
그래도 고양이의 반려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순간, 무릎 위에서 평안하게 잠이 든 고양이를 보는 그런 순간은 연출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와서 로미를 본 고양이 전문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예민한 애들 둘이 살면서 무던한 고양이를 입양해야지, 왜 이렇게 예민한 고양이를 입양했어
로미는 고양이 중에서도 예민한 편에 속했다. 가구 하나만 바꾸어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과하게 그루밍을 했고, 귀 언저리를 늘 강박적으로 긁어댔다.
어느 날 침대 위에서 그루밍을 하던 로미가 전에 없던 커다란 비명과 같은 소리를 냈다. 달려갔더니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며 침대 밑으로 숨어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로미가 귀를 너무 깊숙이 긁어서 커다란 염증이 생겼다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밤, 수술을 마치고 불 꺼진 동물병원의 입원실에 혼자 있을 로미를 생각한다. 아마도 컴컴한 방 안의 우리 속에 갇혀 있겠지. 지금쯤 마취가 풀려 정신이 들었을텐데. 여기가 어디지 하며 무섭고 외로운건 아닐까. 다시 버려졌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당장 가서 데려 오면 안 될까 생각도 해본다. 우리는 밤새 뒤척였다.
돌아온 로미는 아기가 되었다. 귀를 긁지 못하게 깔때기를 부착하니 혼자서 앞으로 잘 걷지도 못했다. 약을 먹어야 하는데 고양이들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냄새가 나면 먹지 않는다. 의사의 설명대로 요거트에 약을 섞어 주었다. 그것도 킁킁거리다가 약 냄새를 맡는 순간 바로 멈추고 가버린다. 나는 바닥에 엎드리고 누워 같이 먹는 시늉을 하면서 눈을 맞추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보면 로미는 묵묵해졌다. 그렇게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 모이는 큰 명절이다. 그 해에는 보르도로 이사간 형제 집에서 모두 모이기로 했다.
일주일을 떠나 있어야 하는 상황.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하루에 두 번씩 와주기로 한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고 화장실을 정리해주기로 한다. 함께 산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긴 이별을 하게 됐다.
일주일 후.
파리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로미는 벌써 문 앞에 앉아있다.
그날 밤 로미는 웬일인지 평소엔 한 번도 올라가지 않던 침실의 의자 위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누워있다. 방안에서 침대 위가 가장 잘 보이는 장소다. 조용히 누워 우리 두 사람을 지긋이 응시한다.
한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또 옆사람을 가만히 바라본다. 점점 눈이 감기면서 꾸벅 꾸벅 졸다가도 한 번씩 휙 고개를 들어 우리를 확인한다. 계속 거기에 있는지, 이게 꿈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쓰다듬어본다. 이번엔 손을 물지 않는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르렁 거린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얘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