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테러, 그 6개월 후의 일상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평화로운 금요일 저녁. 약속도 없는데 오늘 저녁은 외식을 할까, 남편에게 문자를 보낸다. 마리아 루이자 피자 어때? 큰 도로를 벗어나 있어 시끄럽지 않고 테라스가 넓은 피자집이다. 그럴까, 하던 남편은 퇴근시간이 다 되어 계획을 바꾼다. 거기 너무 자주 가서 지겨운데 오늘은 집 근처 그 새로 생긴 식당 어때? 생 마르탱 운하를 산책하고 싶었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럼 그러지 뭐, 한다. 어딜 가도, 무엇을 먹어도, 금요일 저녁엔 다 즐겁다.
나는 콘서트에 처음 가는 사람처럼 신이 나 있었어요. 우리는 맥주도 마구 마실 거였고, 친구도 사귈 거였으니까. 늘 그렇듯이 공연장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고 무대 앞 줄에 친구 기다리는 척 자리를 맡아놓는 사람들을 놀리기도 했죠. (...) 공연은 시작됐고, 사람들은 행복했어요. 보컬이 너무 섹시하다고 노래 중간중간 옆에 있는 여자애와 얘기하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와인 한 병을 둘이서 비우고 적당히 취해 집으로 가는 길. 핸드폰으로 트위터를 들여다보던 남편이 소리친다. 내내 잊히지 않을 삶의 한 순간. "어... 뭔가 큰 일이 난 것 같아... 인질극이 벌어졌데... 식당에 총격이 있었고. 어, 여기... 그 우리가 가려던 피자집 앞집 아니야? 총소리가 아직도 난다는데!"
걸음이 빨라진다. 집에 들어와 서둘러 TV를 켠다. 늘 캐쥬얼한 분위기에 웃음을 잃지 않던 뉴스 전문 채널의 남자 앵커가 하얗게 질려 경직된 표정으로 속보를 전하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사람들이 누워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피 냄새가 났어요. 뜨거운 피. 한 남자가 텅 빈 눈빛으로 나를 보았어요. 그는 더 이상 눈을 깜빡이지 않았고 쓰러졌어요. 도미노처럼 사람들은 바닥에 누웠고, 서로의 몸 위로 엉켜서 떨어졌어요.
상사에게, 동료에게 소식을 알리고 나는 속보를 번역하기 시작한다.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인질극은 계속 벌어지고 있고, 총격도 산발적으로 계속된다. 속보가 난립할수록 나는 냉정해진다. 정확한 수치와 공식적인 팩트를 가려내는 작업에 집중하느라 마음은 끼어들 겨를이 없다. 바로 몇 미터 건너, 우리 동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이라는 것 조차 실감이 안 된다.
끊임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파리에 있는 지인들은 "나는 무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를 단체문자로 보낸다. 소식을 보고 놀란 가족들, 친구들은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내온다. 트위터에는 피신처를 제공하겠다는 멘션이 계속 올라온다.
속사포 총격 소리가 들리고, 오른쪽 귀에서 바람소리가 났어요. 엄청난 이명이었죠.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는 공연장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었어요.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같은 총알에 내 옆의 여자애는 팔을 맞은 것 같았어요, 아니면 같은 총격에 맞았거나. 피를 많이 흘렸고 많이 무서워했어요. 우리는 서로 괜찮냐고 속삭였어요. 나는 머리를 맞았고 영화에서처럼 죽게 될 것 같아, 그러니까 영화처럼 해볼게. 나는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말해주면서 내가 많이 사랑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그 밤이 지나갔다.
토요일 이른 아침, 출근 길. 파리는 적막하다. 지하철 안, 사람들은 입을 닫았고 시선들은 허공을 더듬고 있다. 저 멀리 총을 든 무장군인들이 보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제야 실감이 난다. 앞자리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우리, 왜이렇게 됐나요.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파리에서 무장군인들은 일상의 풍경이 되었고, 나는 그들의 존재에 안심한다. 극장에선 제일 먼저 비상구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하철에선 작은 삐걱거림에도 귀를 기울인다. 모로코 출신의 한 친구는 이제 지하철에서 가방을 뒤적거릴 수도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배낭을 열어 뭔가를 꺼내려 들면 지하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본인을 향해 있다고 말하며 웃는다. 검문도 일상이 되었다. 슈퍼마켓에 들어갈 때도, 미술관에 들어갈 때도, 관공서에 갈 때도 때로는 식당에 들어갈 때도 우리는 가방검사를 받는다. 하지만 누구도 짜증내지 않는다. 되려 안심한다.
그래도 우리는 안다. 테러는 막을 수 없다. 그들의 총구가 무고한 시민들을 향하게 된 이상, 참사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테러가 있었던 파리 10구와 11구는 파리에서도 가장 다민족적이면서 열려있는 동네였다. 어쩌면 프랑스 전체에서도 가장 타인의 종교와 생각에 관용적인 동네였을 것이다. 테러는 어디서든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조심한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고, 친구들과 종종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파리를 떠나지 않았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극장에 가고, 공연을 보고,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신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글을 쓰게 되었다. 작가 로랑 모비니에는 테러 며칠 후, 르몽드의 한 칼럼에 이렇게 썼다.
예술은 삶과 함께 한다. 두려움에 떨지 않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힘이 있을 때 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역설적이게도 폭력이 자리를 잡는다고 해서 예술은 고개를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과 죽음, 공포의 독단을 보여주면서 문학은 우선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한다. 일어난 일은 공포스럽다, 하지만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답이 있다:
삶을 바라보고 탐색하고 사랑하라. 그것을 말해라.
한동안은, 실은 지금도,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이 내 등을 끌어당긴다. 혹시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 현관문을 닫는 손이 저릿하다. 출근길, 돌아서서 가는 남편을 불러 한 번 더 눈을 맞추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본다. 어차피 저녁에 볼 사이면서 종종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늘 많이 고맙다고.
출퇴근길 지하철을 탈 때마다, 혹은 극장에 갈 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한다. 혹시 우리는 같은 운명의 배를 탄 사람들 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인종도 다른 그들 하나하나를 다시 보게 된다. 저 사람은 이제 막 취업한 신입사원일까, 저 부부는 여행자인 것 같은데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 같은 이벤트로 파리에 온 건 아닐까? 저 남자는 집에 아이들이 있겠지, 중학생 쯤 됐을까 등등을 상상하다 보면, 그 "만약의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 모두에겐 가족을 잃은 가족들이 생기겠구나,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이 같은 운명의 배를 탄 사람들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끔 곁에 책가방을 맨 초등학생이 있을 때면 그런 생각도 한다. 나는 이 아이를 덮쳐 구해낼 수 있을까? 그럴 용기가 내게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지만,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몇 해 전 한 드라마에서 듣고 내내 잊히지 않았던 대사 하나가 다시 떠오른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시대는 행복하였다.
"이름 모를 나의 은인에게" 페이스북에 게재된 한 편지의 제목이다. 이 편지는 11월 13일 바타클랑 콘서트 장에서 수많은 사망자들 위에 쓰러져있다가 루이즈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던 한 남자에게 바쳐졌다. 컴퓨터 공학 강사인 39세의 크리스토퍼는 그렇게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루이즈를 구했다. 그녀는 15세였다.
크리스토퍼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사망한 후, 아내 까트린은 남편이 생애 마지막으로 시선을 교환했을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했다. (...) 그렇게 두 달 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루이즈의 편지를 발견한다.
2016년 2월 7일 일간지 Le parisien 기사 중.
표지 사진: 2015 년 11월 15일, 리퍼블릭 광장의 한 커플 / Photo Corentin Fohlen – Divergence
경찰사진: Photo Benjamin Filarski – hanslucas.com
인용: 테러 생존자 증언 "당연히 내 모든 경험을 다 쏟아낼 수 있지. 하지만 이해 못할거야, 당신은"/ 루이즈 27세/ 리베라시옹 2015년 11월 19일 기사 중.
인용: Regarder la mort en face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라) / 로랑 모비니에 Laurent Mauvignier/ 2015년 11월 19일/ 르몽드
인용: 드라마 "황금의 제국" (박경수 작가) 중 한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