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파리지엔의 연애란?
그곳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치자면, 프랑스 중에서도 단연 파리다. « 레볼루셔너리 로드 »의 케이트 윈슬렛에게도,« 섹스 앤 더 시티 »의 사라 제시카 파커 에게도 파리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꿈의 도시였다. 굳이 영화 속을 뒤지지 않더라도, 우선 나만 해도 오래전 그렇게 자유를 꿈꾸며 파리에 왔다.
파리에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남자들을 본 적이 있던가? 파리는 대부분 여자들에게 특별한 도시다. 그리고, 파리지엔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무엇보다 사랑에 열정적이고 욕망에 충실하며 게다가 맛있는 디저트와 요리 속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살(도) 찌지 않는다는 여자들을 떠올린다. 그녀들은 여전히 수많은 작가, 저널리스트 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렇게 세계의 또 다른 여자들이 계속해서 파리를 꿈꾸게 만든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프랑스 그리고 그곳의 여자들, 특히 우리가 « 파리지엔 »으로 부르는 파리의 여자들은 정말 이렇게 하나의 상징이 될 만큼 특별한 구석이 있는가?
물론 모든 파리지엔들이 치명적인 팜므파탈로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파리지엔들의 일상은 어떤 것일까? 그녀들은 어떤 연애를 하고 있을까? 어떻게 열정적이고, 얼마나 자유로운 가?
평범한 파리지엔의 이야기를 하는데 클라라를 빼놓을 수 없다. 클라라는 올해 30세의 잡지사 기자로 전형적인 싱글 파리지엔이다. 현재 파리 2구에서 직장 동료이자 절친인 게이 친구 쥐페와 함께 살고 있다. 쥐페는 가족과 직장에는 아직 커밍아웃을 안 한 상태여서, 공식적으로는 클라라가 여자친구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데, 정기적으로 쥐페 부모님을 함께 뵈러 간다. 가면 클라라는 예의 바른 여자친구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그 대가인지 모르겠지만, 집안일은 모두 쥐페 차지다. 물론, 그게 아니어도 집안일은 쥐페가 더 잘하지만. 섬세하고 예민한 쥐페와 달리 클라라는 털털하고 건망증 심하고 무신경하기가 그지없어 늘 티격태격인데, 그러면서도 둘의 가장 큰 공통 화제와 취미가 있어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노천카페에 나란히 앉아 지나가는 남자들을 평가하고, 서로의 ‘썸남’에 대해 수다를 떠는 거다. 둘은 백마 탄 왕자’를 만나겠다는 인생 최대의 꿈이 있다. 맞다, 백마 탄 왕자.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나도, 백마 탄 왕자라니, 너희들 파리 애들 맞니 했었다. 요즘에도 그런 우화를 믿는 여자가 혹은 남자가 있었던가. 게다가 여기는 합리주의 철학의 본고장, 이성이 과하게 살아있어 냉소도 넘쳐나는 파리가 아닌가? 물론 한편으로는, (나만의) 백마 탄 왕자가 어딘가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글로벌 인지상정이긴 하다. 다만, 만나기까지의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그 부분에서 클라라는 역시 파리지엔이다. 왕자님이 직접 수풀을 헤치며 내게 키스하기 위해 말을 달려 오지는 않을 것임을, 그렇게 수동적인 태도로 기다리면 나이만 든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남자다 싶으면 놀라운 적극성을 보여주는데, 나처럼 유교문화권에서 ‘어디 여자가~’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커온 사람은,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리기 일수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중 하나만 간략히 소개하면, 한 번은 이 사람이다 싶은 썸남이 직장에 나타났는데, 데이트를 몇 번 해도 진도가 없는 거다. 처음엔 나를 쉽게 보지 않는 거라며 좋아했지만,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주말도 건너뛰기 시작하자,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상상하던 클라라, 결국 무리수를 두었다. 어느 새벽 만취해서 남자의 집에 쳐들어갔고, 알몸으로 침대 속으로 전력 질주한 거다. 음… 그렇게 해서 뜨거운 밤을 보내는 걸로 끝났으면 좋았겠으나, 그 남자, 택시를 불러 주겠다며 전화기를 들었다. 전속력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자세가 멋지긴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왕자님’인 줄 알고 있는 힘껏 달려갔는데, 왕자는커녕 인생에서 지나가는 행인 1도 안 되는 인물이었을 때, 그 상처와 절망의 파장도 엄청나다는 거다.
그 절망의 수위가 높았던 어느 날, 클라라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 엄마는 젊었을 때 페미니스트 운동까지 했으면서 왜 내가 잠들 때마다 백마 탄 왕자 얘기를 해준 거예요? »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 그럼, 내가 어린애에게 피임법과 낙태 합법화를 이야기해야겠니? 난 네가 다 크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이 더 낫다는 걸 깨달을 줄 알았지! »
클라라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같은 나이에 어머니는 확실히 클라라보다 현실적이고 똑 부러지셨던 것 같다. 얘기 나온 김에 클라라 가족 이야기를 해보자.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이 런클 라라를 배출한, 파리지앵스럽기로 치자면 둘째 가지 않는 가정이니까.
클라라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프랑스의 68 혁명 세대로, 70년도에 결성되었던 급진 페미니스트 운동조직 MLF(Mouvement de Libération des Femmes) 활동을 하셨던 분이다. 유명 작가인 클라라의 친아버지가 해외로 떠난 후 재혼하셨고, 그로 인해 클라라는 다 큰 남동생이 생겼다. 반쯤은 후천적으로 재형성된 이 가족은 나름 아주 화목해서 거의 매주 일요일마다 부모님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역시 부모님이 혁명세대여서 그런지,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그 솔직함의 수위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상황들이 생긴다. 언제였던가, 클라라가 썸남의 침대에 돌진했다 거절당하고 그 충격으로 비를 쫄딱 맞고 술에 취해 들어왔다가 사고를 친 바로 그때쯤이다. 마침, 가족 식사 모임이 있었고, 남동생과 임신 막 달인 그 부인을 보며 출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상황, 아버지가 클라라에게 너처럼 예쁜 아이가 왜 남자친구가 없냐고 물었다.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노처녀 노총각에게 왜 결혼 안 하냐고 묻는 것만큼 생산성 없는 질문이 또 있을까, 참 그 아버지도 프랑스인답잖게 센스가 없지만, 클라라의 대답도 가관이다.
« 예를 들자면, 어제는 사랑하는 남자의 침대에 알몸으로 눕고 나서야 이 사람이 나를 원치 않는 다는걸 깨달았어요, 그러곤 결국 게이인 내 베프와 잤죠. 아직 솔로인 게 놀랍지 않은 상황이죠? »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이어지는 어머니의 대답,
« 그래, 그렇게라도 다 털어놓고 홀가분하면 그걸로 됐다! »
내가 우리 엄마한테 같은 얘기를 했으면 미친년 소리도 과분할 일인데, 참 대단하다 싶다.
가족 간의 솔직함 도솔 직함이지만, 그렇다, 클라라는 쥐페와 결국 잤다. 문제는 둘 다 너무 익숙한 상대여서 그랬는지 술에 취해서 그랬는지,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고, 덜렁거리는 그녀에겐 자주 있는 일이지만 마침 피임약 먹는걸 잊은 지 며칠이 된 상황이었고…… 결국 임신까지 하게 되었었다. 그 이후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은 고민하고 방황했는가!
클라라는 합법적으로 주어진 몇 주 동안 그 아이를 낳을 것인가를 치열히 고민하다가 결국 낳지 않기로 한다. 사실 쥐페는, 본인 인생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며 낳기를 원했는데, 클라라는 고민 끝에 낳지 않는 걸로 마음을 정한다. 심각하고 마음 아픈 시기였지만, 그때를 생각하니 문득 어이없던 장면도 떠오른다. 수술을 위해 월차를 내자 사연 모르는 직장상사는 지금은 바쁜 시기니 다음에 쓰면 안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클라라, « 그럼 8개월 후에 출산휴가 일 년 쓸까요? » 한다. 역시 당당하고 거침없다. 아무튼, 그런 시련의 시기도 있었지만, 그 후 클라라는 그토록 원했던 백마 탄 왕자 같은, 첫눈에 반한 윗집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역시 단순하면 클라라가 아니다. 문제는, 이 윗집 남자를 쥐페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다시 번민은 시작되고, 기묘한 삼각관계가 펼쳐졌다.
눈치 챘겠지만, 이 클라라의 이야기는 프랑스 TV에 방영됐던 드라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클라라 쉘러 »라는 제목으로 프랑스 2 채널에서 2005년 과 2008년에 시즌제로 방영되었던 드라마인데, 당시 26% 의 시청률로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인기가 없어서 제작 편수가 얼마 안되는 프랑스의 척박한 드라마 시장을 생각하면 엄청난 인기다). 벌써 7-8년은 지난 "철 지난" 드라마이지만, 보통의 파리지엔의 연애를 묘사하기엔 여전히 매우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쿨하다 못해 자식들보다 더 규율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 연애주의 부모들, 가족 간의 금기 없는 성적대화, 낙태, 몇 겹으로 재구성된 가족, 남녀가 섞인 세 사람의 동거 등의 상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우리나라에서도 막장 드라마의 중독성을 이야기하듯 그래서 시청률이 높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다 보니 극적인 상황이 자주 연출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전반적인 상황이나 인물들의 사고방식은 보통의 파리 사람들을 넘지 않는다. 내 주변 프랑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두고 « 아주 현실적인 설정들 »이라고까지 이야기할 만큼, 프랑스에선 특히 파리에서는 그다지 놀라울 것 없는, 일반 시민들 사이의 흔한 사연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막장으로 보이는 딱 그만큼이 프랑스의 연애관과 우리나라 대중의 연애관의 거리일 것이다.
이것이 평범한 파리 여성들의 연애 라이프라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한 걸까? 겉보기엔 막장 드라마 같은 이들의 삶 속에는 어떤 철학이 있는 것일까? 그 자유로움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원칙이 있기는 한 걸까?
평범한 파리 여자들이 사는 법,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