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자와 살고 있다고 했을 때, 처음 만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는 남편의 입맛이다.
« 집에서는 어떤 음식을 드세요? » 혹은 « 남편분이 김치를 잘 드세요? » 하는 질문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을 만났을 때 자주 듣는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이것이 그다지 궁금한 일이 아닌 이유는 국적이 다른 사람들의 공존이 이 사회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어서, 그 입맛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충분히 해결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지점이다. 성별과 나이대 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 특유의 맛들, 김치, 고추장의 칼칼함과 국물요리의 시원함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상 참아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외국 여행을 떠날 때면 컵라면과 고추장을 준비하고,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식사는 한국 식당에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거나 한국인은 한국인이지. 입맛은 어쩔 수 없어
그 한국인이기 때문에 어찌해 볼 수 없는 가련한 운명적 입맛, 타국민의 음식에는 쉽게 느글거리는 한국식 위장을 가진 비련함이라니, 우리는 그 이야기를 다 같이 너무나 진지하게 하고 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가끔씩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우리의 입맛과 국적에는 어찌해볼 수 없는 어떤 숙명 같은 것이 있는가? 김치를 먹지 않고도 몇 달은 아무 그리움 없이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은 내가 한국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기 때문에 드는 건가? 남편과의 삶에서 한 번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있던 이 ‘입맛’의 문제는, 이렇게 종종 갑자기 중요한 것으로 격상된다.
같은 맥락에서 언젠가, 남편과 한참 연애 중일 때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국제결혼한 커플들이 나이가 들면 다들 냉장고를 따로 쓴다는데 괜찮겠어?
신혼 때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던 입맛의 차이지만, 나이가 들면 관계도 노후해져 그것을 극복하기보다는 인정하려는 쪽으로 바뀐다는 말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의도 없이 ‘그냥 하는 말’인 듯했지만, 걱정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 그 말에는 어쨌거나 좀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갈 것이 비단 사랑의 마음뿐이 아닐 텐데, 입맛 또한 시간이 갈수록 변해갈 수 있을 텐데 그 말속엔 «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르다 »를 표현하고 싶은 의지가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입맛이 너무 어렸을 때부터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이라서 변할 수 없고, 원초적인 구석이 있는 거라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온 두 사람의 불일치를 꼬집는데 입맛 만한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가장 많이 하게 될 식사를 두고, 때로는 하루의 유일한 기쁨과 위로가 될 그 먹는 일을 두고, 매번 다름을 느껴야 한다는 것, « 결국 너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게 될 거야… »하며 꼬집는 것은 너무 비정하지 않은가? 또한 그 안에는 우리의 입맛에 대한 불신과 냉소도 들어있었다.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가 한국음식을 좋아하고, 뭐든 잘 먹는 것도 실은 ‘마음’ 이 앞서서 그런 거고, 실제 본인의 입맛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다. 우리는 왜 국적에 따라 입맛까지 확정하고 싶어 하는걸까? « 냉장고 두 개설 »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에 밤잠까지 설쳤더랬다.
2016년 7월, 노르망디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IS의 가톨릭 신부 테러사건 직후 프랑스에서는 « 종교 »의 다름을 앞세우며 공존의 불가능을 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미 몇 세대째 프랑스 사회에서 자리 잡고 살고 있는 이민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종교가 다르다면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으니 일종의 « 검증 »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런 와중에, 테러의 현장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꽃다발 위의 한 글귀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은 그 글귀가 적힌 종이를 찍어 인터넷에 올렸고, 그 문장은 그렇게 자주 인용되며 또 다른 담론의 기회를 제공했다. 안나 가발다의 소설 « 다 함께, 그것뿐 »이라는 소설에서 가져와 적어놓은 문장이었다.
함께 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이지, 차이가 아니다… [1]
각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수 십 년을 공존하며 잘 살아오다가 갑자기 못살겠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동안에는 관용할 수 있던 차이들이 지금은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서 더 이상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그 결론이야말로 이 전쟁을 시작한 전체주의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닌가.
공존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다름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닫힌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비슷한 사람들이라도, 우린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하며 만난 연인 사이라도 그렇다. 관계의 온도가 식어가면 다른 점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니 서로의 차이점이 자꾸 눈에 보이고, 그로 인해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그 차이들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상태와 마음을 돌아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의 경우, 결혼 생활 육 년이 넘어가는 지금, 냉장고는 한 개로도 충분하다. 냉장고 두 개를 둘 만큼 집이 크지 않기도 하지만, 입맛의 문제도 다행히 아직은 한 냉장고 안에서 공존이 가능한 상황이다. 물론, 각자 싫어하거나 꺼리는 서로의 식문화는 있지만, 우리의 입맛은 확실히 변해가고 있다. 수년간 함께 수 천 번도 더 했을 식사를 통해, 나는 되려 우리의 입맛이 멀어지기보다는 훨씬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둘 중 한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음식은 덜 먹게 되고, 함께 좋아하는 음식을 더 자주 즐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안된다고? 입맛은 원초적인 것이라서, 너무 깊은 정서라서 그렇게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거라고?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든다. 냉장고가 두 개면 또 뭐 어떤가! 부부가 꼭 같은 냉장고를 써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잠버릇이 달라서 침대도 나란히 두 개를 놓고 각자 잔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냉장고 두 개쯤이 뭐 그리 큰 문제인가. 그렇게 만족시킨 각자의 입맛이 삶의 즐거움으로 이어져 활력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연인이라고 해서, 부부라고 해서, 굳이 입맛까지 같을 필요는 없다고, 그게 달라도 즐겁게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갑갑했던 마음이 편안해진다.
중요한 것은 « 같음 »이 아니라 그럼에도 함께하려는 « 마음»이니까.
표지그림: Carl Bloch, In a Roman Osteria
[1] Ce qui empêche les gens de vivre ensemble, c’est leur connerie, pas leurs différences...
Anna Gavalda, « ensemble, c’est tou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