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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미성 Dec 26. 2016

꽁비비알리떼, 함께하는 식사의 즐거움

크리스마스 가족 식사의 추억

프랑스의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 만나는 큰 명절이다.

 이곳에 친정이 없는 나는 가능한 매 해 시댁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왔는데, 몇 해 전 시조카가 태어나면서부터 매해 모이는 이 가족의 규모가 두배로 커졌다. 아이의 부모인 남편의 형 부부를 중심으로 양가의 조부모들이 며칠씩 나누어 손자를 볼 것 없이 다 함께 명절을 지내기로 했고, 여기에 남편 형수(내겐 형님)의 언니 부부와 그 쌍둥이 아이들까지 합류하게 됐기 때문이다( 형님의 언니는 시부모님이 얼마 전에 모두 돌아가셔서 마땅히 찾아갈 시댁이 없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 시부모님, 남편의 형 부부, 형수의 언니 부부, 그들의 부모님까지 10명의 어른에 3명의 아이가 모두 모여 명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물론 아무리 서로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다고 해도 이 사돈관계와 사돈의 사돈들까지 모두 편할 수는 없고, 매 해 한 가정이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초대할 수는 없었다.  각자 다른 지방에 사는 이 모든 사람들이 한 해씩 돌아가며 서로를 초대하는 방식을 취하고, 그 해의 지역이 정해지면 각자 알아서 근처에 아파트를 빌리거나 했다. 그렇게 작년에는 남편의 형 부부가 사는 보르도에서 이 모든 가족들이 모이게 됐다.

 

명절의 꽃은 식사다. 

머무르는 거의 일주일 동안의 매 끼니를 물론 모두 함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녁식사, 이틀의 한번 정도로 저녁식사는 대부분 함께 했었는데, 이 가지각색의 다양한 성인들, 정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 자유로운 예술가부터 공무원, 전문직, 사업가, 가정주부, 인문계와 이공계가 모두 모여있으면서 각자 주관도 뚜렷하고 자기표현도 거침없는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하는 식사는 과연 어떤 모양일 것인가 내심 궁금했었다. 

이렇게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식사 자리에서 대화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까?  그 누구도 마음 상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식사는 마무리될 것인가? 

결론적으로 그들 모두와 함께 하는 식사들은 대부분 매우 즐거웠다. 

우선은 매번의 식사 준비가 거기에 모인 모든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비결이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의 식사가 모두 함께 하는 만찬임이 정해지면 우선 식사 메뉴를 주요 멤버들, 각 부모님과 호스트 부부가 상의해 결정하고 모두에게 알려준다. 그 후에 그렇다면 디저트는 어떻게 할지, 와인은 어떤 것으로 누가 준비할지, 요리에 필요한 재료는 누가 맡아서 장을 볼 지를 자발적으로 나서서 통보하기도 하고 또 통보받기도 하면서 각자 할 수 있는 대로 참여하는 식이었다. 식사를 하는 모두에게는 자연스러운  "주인의식" 이 생겼고, 그렇게 그 누군가의 취향과 솜씨를 칭찬하면서 화젯거리가 기본적으로 풍부해졌다.

" 음식 " 이 대화의 주제가 되면, 모두는 그 식사에 집중하게 된다. 누군가가 이 요리는 버터보다 확실히 올리브유가 더 어울린다고 말하면, 과연 그런지 생각하기 위해 미각을 집중하게 되고, 누군가가 전식과 곁들인 화이트 와인에 대해 어제 그 와인보다 별로라고 확실히 빈티지가 떨어진다고 말하면 또 그런가 하며 더 신경을 써보는 식이다. 마음이 흥겨워지면 대화도 즐거워진다. 음식과 요리, 이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민하고 결정하면서 상대의 입맛과 취향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해보는 것처럼, 대화에서도 나이와 지위의 높낮음을 떠나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동등한 눈높이로 대화하는 자세가 생기기 때문인 것 같다.


보수주의자인 남편의 사돈어른이 (내게는 사돈의 사돈이라는 어려운 관계!) 이민자들로 인한 프랑스 사회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며 내게 "모든 이민자들이 아시아 사람들만 같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큰 소리 내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평화롭게"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마음이 너무 열린 나머지 나의 입도 너무 쉽게 열려서 "없는 것처럼 가만히 있어야 봐주겠다는 말씀이신가요?"라고 나는 발끈하고야 말았었다. 친정 집 같았으면 엄마가 복화술로 가만있어라 주의를 주고 누군가는 헛기침을 했겠지만, 그 식탁에서는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의 큰 딸은 "아빠! 그건 인종주의적인 발언이에요!"라고 항변했고, 그의 사위는  "우리 동네 중국인들은 그리 조용하지 않지만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는걸요? "라고 받아쳤다. 사돈어른은 머리를 긁적이며 "뭐냐, 내가 또 실수한 거냐?"라고 말해 웃음을 주었다.      

그 보르도에서 지낸 명절의 어느 아침, 아침 겸 점심으로 브런치를 함께 먹자며 호스트 부부가 모두를 불렀다. 겨울이지만 햇살이 좋아 테라스에 차려진 식탁. 아침부터 아버지와 함께 어시장에 다녀왔다며 남편의 형이 차려놓은 식탁은 푸짐한 생굴과 새우, 조개 등의 해산물로 신선하고 화려했다. 모두가 환호하며 감탄하는 가운데 그의 장인어른이 큰소리로 연설하듯 말씀하셨다. 

" 이렇게 먹는 것의 즐거움을 이해하고 사람들과 함께 즐길 줄 아는 사위를 두어서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요리도 잘하고, 식탁을 차리는 일도 이렇게 멋들어지게 잘 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과 살고 있어서 딸을 둔 부모 입장에서도 참 다행스럽고 또 그런 사람이 우리 가족이라서 뿌듯합니다" 

행여 빈 말이었대도, 사위를 칭찬하는 장인의 덕담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를 주었고 모두의 표정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날의 아침을 떠올리면 화창한 햇살 아래 서서 먹던 생굴과 화이트 와인의 싱그러움이 여전히 입안에 감긴다. 

함께하는 식사의 기쁨은 결국 소통의 즐거움이다. 즐겁고 유쾌한 소통은 늘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기반으로 하듯 함께 먹는 일에도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꽁비비알리떼, 식사의 가치 

꽁비비알리떼 (Convivialité)는 프랑스식 식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라고 한다. 사전에는 잔치, 공생과 같은 뜻이라고 재미없게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떠들썩한 식사 분위기, 여럿이서 어울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같은 의미로 쓰인다. 여기에서 방점은 "여럿이"와 "떠들썩"이다.   

 이 단어를 주목해서 처음 언급한 이는 브리야 사바랭이라고 한다. 그는 1826년 발간된 « 미식의 생리학 » 에서 "미식은 매일매일 다양한 상황의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대화에 활기를 주며 구조적인 차별을 순화시키는 사회적 결속의 요인 중 하나"라고 썼다. 미식의 관점을 음식 그 자체뿐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고 즐기는 환경에까지 가져온 것인데, 일상의 쾌락을 즐기고 구현했던 루이 15세 이후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이 단어는 자주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절부터 파티와 연회 등의 식사에서 사람들은 대화 속 상하 계급을 없애고 평등을 추구하려는 노력까지 했었다는 것인데, 귀족과 부르주아, 평민의 계급이 있었던 시대에 « 평등한 대화 »를 구현했다니, 그것이 실제 가능했다면 놀라운 일이다.

 그야말로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먹는 것의 힘, 식탁의 마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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