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21세기적 이상형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쁘고 잘생기고 섹시하면 인기 있다. 거기에 똑똑하고 능력 있으며 성격까지 좋으면 더할 나위 없다. 조인성이 파리에 온다고 인기 없을 리 없고, 마리옹 꼬띠아르가 한국에 간다고 달라지지 않을 거다. 한국에서 평범했던 나는 전 세계 어딜 가나 그냥 계속 평범하다. 서구적인 미의 기준에 맞추어 모든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다들 비슷한 안목을 가지고 « 예쁘고 잘생기고 섹시하다 »를 평가하게 되었다.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역별, 분야별, 개인별 취향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구릿빛 피부에 초콜릿 복근의 근육질 남성은 프랑스에서는 주로 남부의 취향이다. 햇살이 강하고 바다로 둘러싸여 한 해의 대부분을 해수욕하며 살 수 있는 니스, 코트다쥐르 쪽 지방으로 갈수록 이렇게 몸으로 표현되는 남성성이 인기 있다. 반대로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강한 햇살의 화창함을 휴가를 떠날 때가 왔다는 신호로 이해하는 파리에서는, 육체의 단련보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취향이 섬세한 남자들이 더 인기 있다. 피부와 근육이 노출될 일이 별로 없는 도시일수록 전체적인 스타일과 언어로 어필되는 매력이 중요해진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취향은 그보다 더 제각각이다.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 파리지앵들이라도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의 사이에서, 엠마누엘 베아르와 줄리엣 비노쉬 사이에서 취향은 쉽게 갈린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는, 뱅상 까셀의 섹시함이 기나긴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했으며, 이젠 중년이 된 프랑스 남자 배우 로망 뒤리스를 향한 나의 눈먼 사랑은 자주 이해받지 못했다. 나는 이 뱅상 까셀과 로망 뒤리스의 매력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그들의 감수성과 미적 감각을 분류하고 재단하기도 했다. 섹시함이라는 것은 결핍과 모자람이 원초적인 상상력을 묘하게 자극하며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걸 느끼지 못하고 완벽한 외모에만 집착하다니! 무딘 그들의 감각에 개탄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어떤 남녀가 파리에서 인기 있더라는 정리는 타율 떨어지는 방망이질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남녀가 대체적으로 인기 없더라는 것은 보다 쉽게 정리될 수도 있다. 특히 한 사회에서는 ‘대세’에속하는 어떤 인기 타입이 다른 사회에서는 정 반대로 전혀 어필이 안될 때, 그것은 그 두 사회를 이해하는 재미난 스펙트럼이 될 수도 있다.
여성들의 성격을 묘사할 때 한국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천생 여자’다. 그 여성스러움이 얼마나 지극한지 날 때부터 그렇게 운명적으로 태어났다고 까지 표현해준다. ‘천생 여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부서질 듯 여리여리하고, 그 어떤 감정도 차분하게 표현하며, « 이 남자가 내 남자다 » 말도 못 하는 드라마 속 청순하고 창백한 여주인공들이 떠오른다. 여성의 일이 남성과 늘 구분되던 시절, 교육과 노동, 사회생활, 그 모든 면에서 남성과는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에 만들어진 ‘전통적인 여성성’을 가진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 천생 여자의 다른 편에는 센 여자가 존재한다. 센 여자는 물론 이 반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여성스러움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여성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 그 여자, 좀 쎄 » 같은 표현은 나도 일상에서 많이 쓰지만, 정확한 의미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뭐가 세다는 건지, 고집이 센 건지, 자존심이 센 건지, 목소리가 드센 건지. 성격이 세다는 의미는 또 정확히 무언지. 하지만, 그 느낌만은, 우리 다 안다. 배우 이영애와 김혜수의 차이일 거고, 유희진과 김삼순의 차이일 거다. 실장님을 만나서야 비로소 인생이 순조로운 여자와 본인이 실장님이 되려는 여자. 본인의 욕망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여자와, 그 욕망에 솔직한 여자. 타인을 ‘나’ 앞에 놓는 여자와 스스로가 인생의 중심에 서는 여자일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TV 드라마들은 멜로드라마의 구도에서 이 두 가지 타입의 여성을 경쟁시켜 왔고, 90년대 드라마에서 최후의 승자는 늘, 이영애와 심은하와 같은 천생 여자들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의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면, 그만큼 시대의 공감대가 변했다는 뜻인지, 여성들의 캐릭터는 보다 복잡해졌다. 김삼순은 결국 유희진을 이기고 드라마 최종회에서 남자 주인공과의 데이트권을 획득했고, 주말드라마 속 이지아는 전통적인 모성상을 배신하고 아이를 전 남편에게 보내고는 실장님도 없이 자기 길을 갔다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사랑스러움의 상징 신민아는 보다 발칙해졌다. 그녀는 본인의 욕망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른 남성과 관계를 갖게 되었고, 이를 남편에게 직접 고백까지 했다(영화 키친).
« 천생 여자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커다란 칭찬에 속한다. 그러면 프랑스에서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랑스에도 여성의 타입을 구분 짓는 ‘센 여자’라는 표현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정도에 따라 호 불호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허나 앞서 나열한 주관적인 구분대로 라면, 프랑스 여성들, 특히 파리의 여성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다들 센 여자에 속한다는 다른 점이 있다. 그렇게 파리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 천생 여자 »를이상화시키지도 않을뿐더러 따로 구분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살면서 « 너는, 여자가! » 라는 말을 20여 년 동안 듣고 자란 내겐 종종, 파리의 여성들을 보면서 « 어머, 여자가! »를 속으로 외치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흡연을 했고, 관심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몸으로 유혹하는 일에도 거침 없었으며, 한 프랑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의할 수 없는 남편의 의견에 소리 높여 가열차게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들의 거침없음이 멋지다고 생각 되는 한편으로 때때로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이곳의 남자들은 그녀들을 « 너무 센 » 여인들로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되려 내가 후천적으로 학습한 그 전통적인 여성스러움 들이야 말로 파리에선 참 이상하게 보여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혼 전, 처음 남자친구의 가족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시부모님이 될 수도 있는 어른들을 만나는 자리, 프랑스에서는 고부간이 어떤 모양의 관계가 되는지 실제로 보고 이해할 기회가 없었던 내게 그 만남의 리퍼런스는 당연히 한국의 경우였다.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좋은 이미지를 보이도록 최선을 다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나름 성공적인 만남이었다고 생각하며 다행스러워했다. 하지만 남자친구에게 전해 들은 나에 대한 그들의 느낌은,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 « 속을 알 수 없다 »는 것이었다. 중요한 관계가 될 수도 있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속을 보여주지 않는 포커페이스의 상대를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속을 위장하거나 보여주지 않기 위해 꽁꽁 싸매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들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걸까?
무의식적으로 내가 택한 « 가정교육 잘 받은 », « 천생 여자 »의 태도들, 차분하고 간략하게 이야기하며 대화를 주도하지 않으려 하고, 내내 미소를 지으며 주로 듣는 데에 주력하며, 그 시간 내내 ‘내 생각’과 ‘내 취향’ 따위는 저 멀리 던져두고 있었던 태도들은 그들에게 전혀 매력적으로 어필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우선,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기 생각이나 자기 색깔이 없는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고, « 내조의 여왕 »과 같은 이미지는 어른들에게 조차 그리 어필되지 않는다.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이는 어쩌면 결혼하면서 가정의 중심이 남성이 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나타나는 성 역할의 차이일 수도 있다. 자기 목소리가 없는 여성은 부모세대에게도 고리타분하게 여겨지고, 내조 잘하는 조신한 며느리보다는 아들과 함께 즐겁고 흥미로운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에너지 넘치는 여성을 선호하는 거다.
우리가 ‘여성적’이라고 여기는,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듯한 애교, 남편 뒤에 혹은 남자 친구, 오빠 뒤에 서서 « 그가 알아서 해줄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말하는 듯한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들, 혹은 착하게 보이기 위해 의무처럼 하는 영혼 없는 배려들, 실은 « 하고 싶어, 그걸 원해 »를 말하고 싶은데 « 아니에요, 괜찮아요 »를 말하며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내숭은 파리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성인 여성이 남자친구가 생김과 동시에 갑자기 « 아기 »로 변하는 일은 파리에선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다소 « 변태적인 »모습이 되었다. 오랫동안 내가 자연스럽게 « 여성스러움 »으로 학습한 것들은 그렇게 파리에서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갓 성인이 된 여자 아이들이 귀여움과 섹시함을 동시에 극단적으로 연출하며 성인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현상은 프랑스에는 없다. 더 어리고 젊은 여성을 선호하는 노골적인 사회의 시선 자체도 없고, 이에 부응하여 여성들이 너도 나도 다양한 몸짓과 노력으로 어려지려 하는 현상 자체도 부재한다. 물론, 모든 관계의 무게중심은 늘 어느 한쪽으로는 기울어져 있겠지만, 남성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고 대화할 수 있는 여성을 원한다. 그러니 프랑스에서 인기 있는 성인 여성들의 매력은 아이 같은 귀여움과 순진함이라기보다는, 섹시함과 지성 그리고 유머감각과 같은 보다 성숙한 성인으로서의 가치들이다. 이런 관계에 익숙한 프랑스 여성들은, 본인의 욕망을 표현하는 데도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어쩌면 ‘밝히는’ 혹은 ‘욕심내는’ 여성 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그 콤플렉스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연애할 때, 좋은데 아닌 것처럼 몇 번 튕겨 보거나, 원하는 것을 정확히 얘기하지 않으면서 당연히 마음을 헤아려주길 기대하는 내숭의 테크닉은 관계를 진척시키는 데 있어 도움은커녕 매력을 반감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학생 시절, 하우스 메이트 중에 아오이라는 일본인 여자친구가 있었다. 큰 키에 순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 센스 있는 옷차림으로 같은 여자가 봐도 아주 예뻤고, 무엇보다 말투와 걸음걸이, 손짓 하나에까지 그녀에게는 여리여리, 하늘하늘한 여성스러움이 넘쳐흘렀다. 어느 날 한 프랑스 남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가 없는 동안 약속도 없이 집으로 찾아온 것이 좀 이상해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며 아오이는 집에 없다고 말했더니, 그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내가 전화를 해 줄 수는 있어도 번호는 허락 없이 못 가르쳐주겠다고 했더니, 그는 바로 단념하며 내게 물었다. 남자친구 있느냐고. 황당해하는 내게 그는, « 나는 동양 여자를 좋아해. 동양 여자와 사귀고 싶어서 지금 마땅한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야 »라고 말했고, 그것 만으로는 성에 안찼는지« 혹시 네가 아니더라도, 친구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줄래 » 덧붙이며 임무에 만전을 기했다.
이 일은 그 후로 오랫동안, 이미 포화상태인 « 그때 이렇게 쏘아주었어야 했는데 »의 카테고리 안에 추가되어 불면의 밤을 쓸데없이 연장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고, 당시 하나의 유행처럼 여겨지던 파리에서의 동양여성의 인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엔 이렇게 ‘천생 동양 여자’들을 선호하는 프랑스 남성들이 많이 있다. 아니, 우선 동양여성들 만을 유독 선호하는 프랑스 남자들이 있고, 그중엔 이런 ‘천생 여성스러움’을이유로 동양여성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늘어놓는 ‘동양여성 예찬론’ 안에는 종종 파리지엔들에 대한 불만과 피해의식이 보인다. 그들은 파리지엔들이 함께 하기 얼마나 피곤한 존재 들인지에 대해 불평하면서, 동양여성들이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여성스러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여러 가지 사회적 정황으로, 나는 이들이 파리의 연애 시장에서 뒤처지거나 실패하며 마음에 상처와 부담을 쌓아가던 사람들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관계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파리지엔들의 요구와 기대치에 발맞추기가 버겁고 피곤해진 남자들이 소통에서 보다 수동적이고 배려 넘치는 ‘천생 동양 여자’들을 만나 마음이 편해졌고, 그렇게 파리지엔들은 ‘옳은 예’ 가 아니었다고 정리하며, 동양여성들에 대한 ‘거대한 환상’을 키우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 나는 동양여성들과 사귀려고 해 »라는 인종주의적 발언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가? 동양여성이 그렇게 골라 잡으면 다 비슷한 공산품인가?
물론, 그 또한 각자의 취향이고, 각각의 사정이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내가 판단할 권리는 없다. 또한, 동양여성과 사귀거나 결혼한 모든 프랑스 남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나도 또한 프랑스 남자와 살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다만, 여권이 더욱 발달한 프랑스 사회지만, 그래서 우리 여성들이 사랑하는 파리지만, 여기에도 이전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그리워하며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는 프랑스 남자들이 있음을, 그저 ‘동양여성’이라는 이유로 ‘주관적인 환상’을 가지고 접근하는 많은 남성들이 있음을, 프랑스어와 그 문화에 아직 익숙지 않은 여성들이라도 알고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리에는 맞선과 소개팅이 없다. 물론, 최근 커플이 된 남녀가 각각 솔로인 다른 남녀 친구들을 서로 소개하여주기 위해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거나 하는 일은 있지만, 그것도 ‘다 같이’ 있는 가운데서 서로 ‘알아서들 잘 해볼’ 일이지, 우리처럼 주선자가 « 그럼 둘이 좋은 시간 보내. 나는 이제 빠질게 » 하면서 멍석을 깔아주는, 이제 정말 둘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명분까지 쥐어주고 떠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단체 파티를 위장한 만남의 자리도 친구와 지인들이나 되니 주선하는 것이지, 동창회에 다녀와 자극받은 엄마가 주말에 집에서 뒹굴 거리지 말고 선이나 보라고 등 떠미는 그림은 프랑스에서는, 특히 파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애는 사생활에 속하고, 아무리 가족 간이라 해도 사생활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각자의 연애 생활은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부모가 주선하는 만남은 상상만 해도 어색하고 끔찍한 일이니까. 주변 사람이 나서서 ‘멍석’ 깔아 줄 일 없는 이 도시에서는 결국 스스로 알아서 끌림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보통의 만남도 « 데이트 »로 만드는 파리지앵들의 능력은 어쩌면 이런 환경의 산물일 수 있겠다. 이렇게 ‘각개전투’ 로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일상 속 만남들이지만, 공통적인 이상형의 타입들, 사회적 분위기가 대강이라도 있을 텐데, 이 부분을 알아보다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조건과 스펙’ 이 상대를 유혹하는 데 있어 (대부분의 경우)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거다. 우선은, 그들이 만나는 환경 자체가 이미 서로에 대한 큰 틀은 파악하고 만나게 되는 맞선이나 소개팅과는 달라서 만남에는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라도, 결혼 적령기의 한국의 남녀들에게는 연애를 시작하는 데 있어 ‘가장’까지는 아니어도 중요한 요건에 속하는 상대의 직업과 경제력, 능력들이 파리의 남녀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조건이 아니라고 한다. 상대의 집안과 경제력보다는 어느‘분야’ 에있는 사람인지, 본인과 얼마나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지, 대화가 통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통할지가 훨씬 더 중요한 요소라는 거다. 물론, 관심 있는 분야의 유명인이라면, 만약 내가 시나리오 작가인데 상대가 성공한 프로듀서라거나, 내가 음악잡지 기자인데 상대가 유명 작곡가라면, 상대의 성공이 후광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의사, 변호사와 같은 일명 ‘사’자들어가는 전문직이라고 해서, 그것이 결혼의 중요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솔직히 이 부분은 몇 사람에게 확인을 해 보았고, 확신에 찬 그들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백 프로 믿기 지가 않았는데, 곧이곧대로 못 믿고 자꾸만 되묻다가 문득, 내 안의 속물성과 냉소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사회적 환경을 헤아려보면 일리가 있다. 우선, 프랑스에서 결혼은 그리 공고한 제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연애의 끝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프랑스에는 결혼하지 않고 십년 이상, 혹은 평생을 동거상태로 지내는 커플들도 흔하다), 결혼 이후에도 기나긴 시간이 있음을 안다. 그러니 경제력이 좋은 상대와 가정을 꾸리는 일은 물론 내 인생에도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일도 쉽지는 않고, 그 이후로도 관계는 안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또한,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룬 자식들의 삶에 부모가 크게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는, 진지한 연애를 위해 상대의 집안을 따져 볼 이유도 없어진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혼 후까지 직업을 가지고 평생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독립적으로 커리어를 키워간다.
이런 환경이라면, 연애에서 오롯이 사랑과 정서적 안정만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슷한 관심사와 세계관을 가진 사람, 오랫동안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함께 걸을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일에 비로소 집중하게 될 것 같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도 볼 수 있듯, 결혼제도는 오랫동안 서민 남녀에게 신분상승을 가능케 해주는 부르주아의 문화였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이런 결혼관은 19세기의 것으로, 아주 낡은 사고가 된 듯 보인다. 아직 이 결혼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프랑스인과의 연애는 « 19세기와 21세기의 만남 » 처럼 숱한 오해를 빚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