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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pr 26. 2018

지나간 일 적어 놓기

지난 노트를 들척이다-2017년 8월의 이야기

베로와 그녀의 가족이 키토에서 쉬러 내려왔다. 그녀의 남편 탐은 나와 동갑내기이고 베로는 몇 살 더 젊다. 지금 산은 조금 부산스럽다. 6살 여자아이가 종일 조잘거리고 뛰어다니고 뭔가를 하자고 조르는 바람에 그렇다. 바람이 많이 분다. 베로의 딸과 산책을 나갔다. 폴짝폴짝 뛰며 내 앞에서 걷고 뛰는 것이 하도 이뻐 “이쁜 아, 이쁜 아” 했더니, 그 작은 입으로 “나는 이쁜이가 아니고 아말리아예요” 한다. ‘띵’ 또 한방 맞았다. 그렇지, 그 작은 입으로 또박또박 한 말 이 맞는 말이지.  

십여일 삼시 새깨 밥하며 손님 접대하느라 바빴다. 물론 내가 좋아 자처해서 한 일이지만 때 마쳐 밥 하고 설거지하는 일은 정신수련 같았다. 나는 수련을 잘 마쳤고 친구들과 그들의 딸은 어제 떠났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또 한 번 제대로 느꼈던 것은 ‘내가 무언가를 조금 알게 됐다고 자만치 말아라’라는 누군가의 가르침이다.  그렇다. 그 앎이라는 것 또한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나한테 통용되는 것이라고 남에게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다르고 생각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언제나 배우며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지 말자.  


친구들이 지내다 간 캐빈 청소도 했고 햇빛 반짝했을 때 이불도 베개도 모두 쨍쨍한 볕에 말렸다. 그리고 구름이 몰려오기 전 거둬들였다. 태양열 전기도 인터넷 스위치도 모두 꺼두었다. 상습적으로 물이 새어 떨어지는 천정 밑에 물밭이 그릇들도 놓아두었고 창틀 틈새로 새어들어 올 빗물을 잡기 위해 특별히 두꺼운 수건으로 덫을 쳐 놨다.  이제 비를 맞을 준비는 모두 되었다. 천둥은 하늘이라는 거대한 스피커가 터질 듯 ‘우르릉쾅쾅’  터져댄다. 거친 비는 와일드함이 뭔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쏟아져 내린다.  하얀 번개도 하늘을 갈라놓겠다는 듯 쳐댄다. 천둥 번개에 고양이들은 침대 밑으로 또 서랍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나는 천둥소리를 듣고 번개를 바라보며 철렁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붙들며 제발 집의 지붕이 무사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어제 쏟아진 비로 온 산이 깔끔하게 청소가 됐다. 날아다니던 먼지도 다소곳이 가라앉았고 공기는 더 신선하고 아침 햇볕은 끈끈함 없이 뽀송하고 따사롭다. 커피를 끓인다.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아침에 한 잔 때로는 두 잔을 마신다. 내가 마시는 커피가 내 몸을 산성화 시킨다는 것도 안다. 레몬이나 오렌지 등 신맛이 나지만 우리 몸에 들어가면 몸이 알칼리성이 되는데 도움이 되지만 커피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아직 커피를 내 삶에서 몰아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내 에고의 의견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커피에 베이킹소다를 아주 조금 넣어 마신다. 무슨 연구결과에 커피에 베이킹소다를 조금 넣으면 산성인 커피가 알칼리성으로 변한다나 어쩐다나 하는 말에 혹 해서 시도해 보고 있는 중이다. 맛에 약간의 변화가 있긴 한 것 같지만 커피맛을 크게 바꿔 놓지는 않는 듯하다.  


아침 명상 자리에 앉아 앞산을 바라본다. 홀연히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순간 어렴풋이 그 말의 꼬리를 잡은 거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런저런 영적 체험을 해 봤고 그런 체험으로 인해 심오하게 눈이 뜨이고 마음이 열렸던 적, 그래서 세상을 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많은 영적 체험이라는 것이 나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에고스런 마음이 만들어 내는 허상이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허상들을 없애고 나니 결국 남는 것은 존재이다.  

서머 옴이라 불려졌던 한 존재가 있었다. 그녀가 보이는 세상을 떠나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가는 그녀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그녀는 내가 노래 부를 때 언제나 행복하게 들어주었었다. 백발에 얼굴 가득 하얀 웃음 가득했던 그녀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7년 너머의 시간 동안 많은 죽음을 봤다. 사람들은 죽을 자리를 찾아들어온 야생동물들처럼 모여들었고 한동안 천국에 들어온 냥 즐겁게 살다 죽었다. 그녀도 약 2 년 전 이곳으로 이사와 언제나 웃으며 즐겁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어 난 곳으로 돌아가 알을 낳고 죽는 연어처럼 말이다. 노년에 이곳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물론 그 첫 번째 이유로 적당한 기후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로 물가가 아직은 다른 도시에 비해 조금은 싸서 연금으로 살아가기에 적당한 곳이어서 일 것이지만 모두는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이곳에 온다. 모두에게는 알을 낳는 연어처럼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전생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죽는 그들은 전생에 떠난 곳으로 이 생에 돌아와 그 끝을 맺는 것일까 아님 다음 생이 시작할 곳에서 이생을 맺는 것 일가… 내가 죽을 곳으로 믿고 찾아 들어가는 곳은 어디일까 궁금하다… 


칠월칠석이다. 견우와 직녀에게 허락된 단 하루의 날이다. 아침 빛이 밝자마자 비가 내린다. 그들은 슬프다. 내게도 직녀의 마음이 있다. 그들은 오늘 몇 시에 만나는 것일까. 만나고 나면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올까. 이렇게 비가 오는데 그들은 만날 수 있을까. 그만 울지… 눈물이 강이 된다는데 강물이 불어 그리운 이를 보러 갈 수 없으면 어쩌려고… 차라리 만나고 나서 울지, 그럼 강물이 불어 돌아가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이메일 하나 여는데 1분, 페이지 하나 여는데 3분, 지난번 천둥과 번개가 내 인터넷 안테나와 와이파이 박스를 뽀개버렸다. 인터넷 회사에서 사람이 왔었고 그는 나무 위에 매달린 안테나를 너무 높다며 때어 내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리에  새로운 안테나를 달아놨다. 장비 없이 나무에 오르는 일이 위험한 일이라 나로서는 더 억지를 부리지 못했지만 속으로 “마뉴엘이라면 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그가 있을 때는 그냥저냥 괜찮았던 것이 그가 떠난 후 참을 수 없이 느리고 연결이 되었다 끊겼다 한다. 다시 전화를 했고 오늘 그가 다시 오기로 했는데 이제 4시가 넘었으니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보니 조금 쓸쓸한 마음이 인다. 노래를 불러야 할 때이다.  하루하루를 슬퍼하며 살지는 않지만 때로 존재한 다는 것 자체가 고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노래 부르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고독감을 달래주기 위한 방편이다.  

한동안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녔음을’을 구구장창 부르다가 요즘은 ‘묻어버린 아픔’을 불러댄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을 때 슬픈 노래를 한동안 부르고 나면 맵고 뜨거운 국물을 땀 흘리며 먹은 듯 가슴 저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 바람은 다시 내게 말한다. 그저 존재한다. 때로 약하고 때로 마른나무 껍질을 모두 벗겨내 버리는 바람처럼 강하고 때로 물을 머금은 화초처럼 촉촉하고 때로는 찬란한 아침 빛처럼  반짝이고 때로 떠 오르는 태양처럼 가슴에서 새로운 싹이 터 오르고…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 


원숭이처럼 나무에 올라 깃발을다는 마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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