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한계일지 무한함일지

나의 귤과 너의 귤이 애초에 같을까

by 윤신


짧고 긴 일기를 쓰며 언어의 한계를 자주 느낀다. 내가 쓴 글들이 과연 나의 감정과 상황을 온전히 전하는 걸까 좌절한다. 어쩌면 언어의 한계라기보다 나의 한계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언어는 실체가 없는 주제에 자유롭지도 못하다. 이 단어도 아니고, 이 문장도 아니고. 모두 지우고 난 빈자리가 내 마음에 가까울 때가 더 많다. 표할 데 없는 반감과 답답함에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괴성에 가까운 말을 적는 게 낫지 않을까 자문한다. 쿠루쿵쿵 콰와콰앙 느끼다가 모구르르몽몽하고 삐익했어,라고 쓰는 게 차라리 나을지 몰라. 한없이 쏟아지는 햇살의 온도를 닮은 말을 쓰는 것도 그렇다. 따스한 눈빛 한 번, 손길 한번 건네는 글. 아무래도 내가 가진 글발로는 제대로 건네기가 힘들어 또다시 좌절하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이 써졌다 지워진 흰 공백 앞에서 시무룩하고 만다.

그런 경험의 축적은 표현하고 싶은 감정, 생각, 색, 모양, 사람, 어느 하나 시작조차 꺼내기 힘들게 한다.



아마도 그래서다. 아윤이에게 수많은 단어의 발음과 입모양을 가르쳐주다 문득 아득해지고 만 것은.

노랗고 긴 바나나, 뾰족한 밤송이, 보라색 가지, 겨울의 귤과 아침에 빨간 사과.

채소와 과일의 모양과 색을 이야기하다 내가 감히 아기가 말하고 상상할 세계를 제한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고 관찰도 하기 전에 이름을 붙여 단지 '명사'일뿐임을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한정된 사고를 흘려 넣어 밤송이는 밤송이에만 그치고 귤은 귤, 사과는 사과에만 그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아이의 언어도 나처럼 자유롭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언어가 아닌 언어의 한계를 먼저 배우는 건 아닐까. 에잇, 차라리 인간에게도 개미의 페로몬 비슷한 소통 거리가 있다면 좋을 텐데.



사실 내 능력과는 별개로 언어가 가진 한계나 어려움은 명백하다. 보이고 들리고 느끼는 자신만의 감각을 선명하게 표현해내기란 얼마나 어렵고 때론 불가능한가. 또 우린 불가능에 가까운 완벽한 전달을 위해 얼마나 대화하고 서로의 언어 저변의 바탕과 배경을 알아야 할까. 나의 귤과 너의 귤이 애초에 같을까. 기억의 시작과 느낌과 맛이 온전히 같을까.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동시에 귤은 귤이다. 시던 달던 파랗던 노랗던 내가 말하는 귤은 네가 말하는 귤이다. 일단은 그 일반성의 시작을 아윤이에게 가르치자. 내가 전할 수 있는 만큼의 언어를 전하자. 손톱이 노랗게 물들도록 까서 먹기도 하는 귤. 나 개인의 기억을 아윤이에게 전한다.



이제 17개월에 든 나의 아기는 몇 개의 단어를 발음한다. 이거, 아빠, 엄마, 유떼요(주세요), 아 이뻐, 으응, 프드(포도), 꾸(귤), 꼬꼬(애착 이불, 우리가 꿀꿀이라 부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반적인 명사 혹은 문장들이지만 뜻을 알고 표현하는 게 참 기특하다. 달라고 칭얼거릴 때 '주세요 해야지' 하면 두 손을 전에 없이 공손히 모으고 '유떼요'그런다. 뭐 달라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건가. 안 줘야지 싶다가도 그 순순한 작은 어깨에서 연결된 두 손을 볼 때면 안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일부러 몇 번 더 시킨다. 주세요 해야지. 유떼요. 주세요. 유떼요. 자, 다시 한번.

그러면 이내 두 손에서 공손함은 사라지고 씩씩 화를 내기도 하지만.



며칠 전 어느 밤, 그와 난 잠든 아기 양쪽에서 보드라운 뺨을 쓸기도 하고 뽀뽀를 하며 아기의 잠을 감상(잠자는 아기만큼 예쁜 건 잘 없다) 하던 중이었는데 순간 아윤이가 우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우리의 뽀뽀가 지나쳤을까(늘 그렇다) 생각하던 중 아가는 이내 조그맣고 말랑한 손을 뻗어 찹쌀떡 군의 뺨을 쓸어내린다. 나의 뺨에도 따뜻하고 작은 힘이 닿는다. 눈도 뜨지 않은 채 아가는 속삭인다. 아 이뻐. 한번. 아 이뻐. 두 번.

엄마 아빠의 뺨에 제 손이 닿을 때마다 입을 조물거려 말한다. 나의 동공이 커진다. 심장이 가볍고 빠르게 뛰다 멈춘다. 진한 설렘에 도취되었을 때 사람들이 표현하는 '심장이 멎는다'는 말은 옳다. 아기의 읊조림에 우리의 심장은 잠시 멈춘다. 그리고 가볍게 다시 뛴다. 도콩도콩.



역시 아무래도 그날 느낀 감격을 그대로 전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적어 내린다. 이 기록은 언젠가 그 밤에 기억을 다시 불러올 것이다. 잠결의 아가가 어떻게든 제 사랑을 표현하며 우리의 뺨을 쓸었던 그날의 기억을.

아 이뻐, 세 글자에 담긴 무한히 뻗은 감정들을.



적다 보니 이상하다. 내가 가진 단어는 아이의 것보다 훨씬 훨씬 많은데 아기의 한마디에선 한계를 느낄 수가 없다. 그 자체로 완벽하다. 이거, 아빠, 엄마, 유떼요, 아 이뻐, 으응, 프드, 꾸, 꼬꼬. 여기엔 내가 가진 언어에 대한 고민이나 표현의 한계가 들어갈 틈이 없다. 심지어 사람의 수만큼 많을 애정과 사랑의 감정도 '아 이뻐' 하나로 괜찮을 것도 같다. 눈에 콩깍지가 씌듯 귀에도 콩깍지가 씌었나 보다.

역시 내가 가진 한계를 아이에게 투영시키지는 말아야겠다.

아기의 언어는 무한한 탐험의 시작이니 이대로도 충분하다.



아가.

고 작은 입과 혀로 만들어 내는 낱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 넌 알까.

부정확한 발음과 몇 안 되는 모음과 자음의 조합으로도 세상 가득 우릴 달뜨게 하는지 너는 알까.

수많은 문장들보다 너의 한 마디로 충분하기도 하다는 걸

너는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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