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난 게을러서 글을 써.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저 누워만 있고 싶은데 몸이 허락하지 않아. 움직여, 뭐라도 해. 강박처럼 나를 일으키는 거야. 뭐라도 해야 하는 천성 때문이지. 그런데 가만히 앉아 글을 쓰고 나면 그래도 뭔가 했다는 안심이 찾아와. 그저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말이야.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공감(이해라는 단어를 썼다가 공감으로 바꿨다. 우린 그 누구도 결코 타인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한다. 왜 아니겠는가. 글을 쓰는 행위는 A4지 한 장만큼의 안도와 만족을 준다. 오늘의 한 장을 끝냈다는 느낌, 몸을 최소한으로 움직이면서도 그게 뭐가 됐든 하긴 했다는 저동작 고효율의 자족. 하지만 아쉽게도 그 효력은 아주 얇고 짧아 하루면 공기에 분해된다. 허기에 진 사람처럼 중독된 사람처럼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글이든 책이든 자신을 채울 언어를 찾는다. 허비되지 않은 느낌, 근원적인 충실감. 결국에는 생의 의미까지도 이어지는 갈망. 우리들의 이것은 어디로부터 이어졌을까. 사람들은 이 갈증을 어디에서 채우는 걸까.
b 가끔 보면 가죽을 남기겠다고 버둥대는 호랑이 같아 나는. 뭘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럴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슬아처럼 박준처럼 천성적으로 재능이나 감각이 있는 사람이 못 되는 나로서는 많이 읽고 많이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 역시 한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고 핑계 대며 설렁설렁 읽고 드문드문 쓴다. 책 읽을 시간에 푸른 수영장 물속에 비친 마름모의 빛에 넋을 놓고 봄에만 저렴히 파는 2000원의 노오란 프리지아 한 단을 산다. 꽃봉오리를 야무지게 닫고 있는 꽃송이들이 고개를 떨군 탓에 낱알의 벼 이삭 같다며 우린 웃었다. 그리고 그 한 단의 줄기를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는 갓난아기 엄마에게 준다. 삼월의 아직 쌀쌀한 바람 탓에 아기는 안온한 가제 이불에 덮여 엄마 품에 고개를 묻었다. 활짝 열린 숨구멍을 달싹이며 단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주는 걸 쉽게 받을 순 없다. 그녀는 조심히 손을 뻗어 그녀의 팔뚝만큼 가는 줄기를 쥐었다. 이건 풀인가요? 나는 웃었다. 아니에요. 프리지아예요, 물에 넣어두시면 꽃이 필 거예요. 그녀는 꽃이 피듯 웃었다. 이제 봄이었다. 꽃도 사람도 피는.
a (웃음) 그래도 글을 쓰니 좋은 건 그 어떤 일상도 소재가 된다는 거야. 사소한 일이라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 결국 글로 남게 되는 거지.
나는 게으르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가만히 앉아 어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타인이 만들어 놓은 세계와 지성에서 유영한다. 하지만 게을러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글쓰기는 불안과 갈증이 근원이다. 글을 쓰면 불안이 사라진다. 내가 사는 이 시간이 그저 지나간 것만은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 남겨진 말이 위로한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한 줄기 의미를 찾으려, 작은 꽃에도 이름을 붙인다. 기록으로 남기며 나의 불안을 물 위에 새긴다. 게으른 a와 가죽을 남기려 애쓰는 b의 글쓰기의 충족감도 일시적인 불안의 상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흐르는 무의식과 시간 속에서 조금이라도 의미를 발견하고 끝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그 몸짓은 신성하다. 어떤 초기 인류는 자신의 손에 집히는 아무것으로나 그림을 그렸고 문명이 발달하자 곧 글을 썼다. 그들은 이미 죽었다. 하지만 그 본능은 우리의 피로 남아 어쩌면 허무하게만 보이는 이 시간도 꼭 보잘것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쓰고 또 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글쓰기는 일종의 소비되고 소멸할 생에 대한 작은 위로일 것이다.
자, 여기에 노랗게 핀 꽃이 있다. 이 꽃의 이름은 프리지아.
이 꽃이 핀 찬란한 순간을 난 당신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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