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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에서

단어를 수집하다

by 윤신


사월의 바람을 맞으며 섬의 끝에서 단어들을 적었다. 창백한 콘크리트 미술관 안이었다. 들리는 것, 보이는 것, 연관 없이 떠오르는 것. 하나 둘 적으니 천 걸음도 걷기 전에 작은 화면이 낱말로 가득 찼다.


내가 사유하는 것은 나를 설명할 것이다.


간혹 낱말이 문장이 되는 순간에는 잠시 서서 문장의 형태를 바라봤다. 주어와 부사, 동사를 뜯어보고 그것들은 어디에서 왔나를 고민했다. 회색 선이 만들어낸 세계 안에서 단어들과 호흡했다. 각개의 순간은 모음과 자음을 타고 단층처럼 내 안에 쌓였고 나는 발화되지 않은 단어들이 되어 잠기거나 떠올랐다.


몇 개의 유리로 만들어진 램프 앞에서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인간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 새로웠고 빛이 통과하는 유리만큼 조명에 적절한 물질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과 램프의 양식이 지향하는 바는 다를 테지만 둘 다 인간도 절제할 수 있다고 동의하는 데 일치했다. 자신의 작품 안에 자연을 담으면서 경의를 표했다. 외부에서 오는 것 가운데 빛만큼 위대한 것은 없지. 낮게 속삭이며 그들 모두 빛과 자연을 품고 있었다. 홀로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둥근 홀 안을 걸을 때마다 내 발자국 소리에 공간이 진동하고 울렸다. 공간의 울림, 이라고 나는 적었다. 일순간의 감각이 다섯 글자에 축소되어 담겼다. 가능하면 그곳에서의 모든 것을 글자로 담고 싶었다. 지나치는 단상을 글자로 이루어진 선으로 칭칭 매어 내 안에 두고 싶었다. 나는 계속 썼다. 높은 벽을 지나자 소리가 멈췄다.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소리는 폭력적이고 청각은 수동적이다. 곡선의 귓바퀴가 무작위로 소리를 모아 고막을 통과시키면 듣고 싶지 않아도 소리를 거부할 방법이 나에겐 없다. 벽이 그것을 막았다. 벽, 이라고 쓰고 뒤에 소음의 침묵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고요이자 고립. 소리가 듣고 싶을 때 따로 빼내어 들을 수 있는 방법도 나에겐 없다. 아무리 간절해도 그리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이유다. 모든 것이 순간으로만 남을 수 있도록 감각이 허락한 이유다.


모아진 단어들이 한 더미가 될 즈음 나는 마지막 문만을 남겨두었다. 어두운 실내에는 숨겨진 조명과 버섯 모양의 램프만이 밝지 않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을 만든 이들이 죽고서도 그곳에 남았다. 아마 내가 죽고서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내가 나열한 단어들도 나보다 더 오랜 생을 살게 될까. 누군가 그것을 알아볼까, 주워 갈까, 금방 사라질까. 어느 쪽이든 괜찮을 일이다. 나는 다만 내가 가진 단어들을 손에 꼭 쥐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문을 여는 순간, 더 이상 적지 않기로 했다. 그들 곁에 미처 담지 못한 낱말을 두고 갈 것이다. 이 모든 단어를 두고 이제 그만 몸을 날리는 바람 속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수집한 단어 목록


청보리 밭, 정갈한 바다, 콘크리트 덩어리, 직선의 춤, 현무암의 조각, 누워 있는 머리칼의 나무, 몸을 날리는 바람, 갈대, 낯선 새의 울음, 몸을 둥그렇게 마는 공벌레, 동백, 갈대가 스치는 소리, 비선험적 경험, 검은 돌담, 유속, 물의 진동, 빈 집, 공간의 울림, 지하의 여신 페르세포네, 잘린 하늘, 하현망간의 달, 평등한 복도, 그림자, 계단, 아르누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의 조각, 야생화, 지하,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 그 땅의 수호신), 이 모든 등이 켜진 방을 상상한다, 모든 것에 상상할 자리를 남겨둔다, 죽은 무희, 폐쇄와 개방, 명상, 회색 미로, 빛과 어둠, 벽, 소음의 침묵, 고요, 고립, 돌틈 사이, 원 안의 사각형, 간접 조명, 차가운 표면, 1902, 성산일출봉, 초록 유채, 램프의 방, 청년과 장년에서 노년으로의 인간,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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