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여기 비 온다·
통상 가운데 점은 마침표가 아닌 말줄임표에 쓰인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지 무시하는지 그저 모든 말의 쉼이나 정리에 중간 점을 찍고 자기 할 말은 이걸로 끝이라는 듯 무심하고 시크하게 돌아서지만 매번 그 애매한 문장의 끝에 매달려 입을 벌리고 갈구하는 것은 나다. 뭔가 더 이어지고 남겨지길 기대하며 미완결의 가운데 점을 바라보고 점들 사이에 몇 없는 문자를 나름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비 온다, 라. 그녀의 집은 연립주택의 꼭대기 층이다. 아랫집 할머니는 이리저리 늘어놓은 고추나 잎들을 서둘러 걷을 것이고 계단을 지나는 비대칭의 걸음이 그녀가 있는 거실까지 모두 들릴 것이다. 게다가 오래되어 헐거워진 창틀을 때리는 빗소리는 꽤나 크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그녀의 집은 비가 오면 함께 운다. 연회색의 콘크리트는 빗물을 꿀꺽 삼켜 점점 젖은 냄새를 풍기고 집 안은 사각의 어항처럼 물속에 갇힌다. 습기로 나무 무늬의 시트는 살짝 뜨고 고양이가 지닌 특유의 냄새는 더 진해진다. 큰 창으로 보이는 앞산은 흰 안개로 가득 차고 주위 역시 온통 희다. 눅진하고 색 바랜 잔 꽃무늬 벽지마저 축축한, 그 집에 남겨진 비의 감상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미 몇 년 전의 기억이고 그녀가 말한 지금의 비는 전혀 다른 색일지 모른다. 전혀 다른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녀의 비 온다는 말은 순전히 아직도 건조기의 혁명적인 이기보다 햇볕 건조를 고집하는 사람으로서 늘 그렇듯 옥상에 널어놓은 빨래를 이제 찾으러 가야 한다는 말일 수도, 갱년기에 도졌던 관절통이 다시 일어났다는 말일 수도 있다. 도무지 그 무엇도 아니면 비 오는 날은 음이 수평으로 퍼지니 아코디언을 연주하기에 알맞다는 말일 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안다. 그녀의 문장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비가 오니 비가 온다고 말할 사람.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으레 침묵하고 쓸데없는 감정을 배제하는 것은 그녀의 특기고 그 모든 철저한 반대는 나의 특기다. 그녀의 말은 투명한 물고기처럼 척추와 내장이 그대로 비치지만 난 늘 그것을 의심했다. 투명이 투명일리 없다. 참고 견디는 이의 퉁명한 태도는 과히 의심스럽다. 그것이 전부일리 없다. 괜찮다, 가 괜찮을 리 없다. 그녀는 삶이 얼룩을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독이든 꿀이든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삼키고 대신 자신의 것을 뺏기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가련해서 어리석은 그녀는 맨 두 손에 들어온 것만이 실재라 여기며 쥐고 놓지 않았다. 돈이든 남자든 자식이든. 거기에 언어는 무용했다. 주어진 대로 살고 입을 꾹 다물며 또각또각 코앞을 향하는 그녀였다.
나는 궁금했다.
땀에 절은 스타킹을 돌돌 말아 벗으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왜 저런 표정으로 까만 봉지에 소주 한 병 달랑달랑 사들고 올까. 왜 저런 뻔하고 나쁜 남자를 만날까. 왜 소리 내서 울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의문이나 고통을 뱉기보다 삼키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고통을 들출 자격이 나에겐 없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
그녀는 지금껏 삶에게서 어떤 것을 받아먹고 어떤 것을 소화시키고 어떤 것을 배설했을까. 그리고 그 안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한때 꼬인 줄로 연결되었던들 인간은 결코 나 외의 인간을 알 수 없다. 관찰한 대로 짐작하고 가늠할 뿐이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고 천진히 알아듣는 척할 뿐이다. 비가 온다면 비가 올 것이다.
한때는 그녀도 모든 것에 의문을 갖고 미련을 가득 품어댔음을 안다. 그러나 어김없이 밀려드는 생활에 한 두 마디가, 문장 전체가 그리고 온 문단이 파묻히고 결국 침묵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녀는 차차 말을 줄이고 미완의 점 하나를 둔 채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을 것이다.
더 하고 싶지만 더 할 수 없는 말들을 가운데 점 사이에 두고 한참 머뭇거렸을 그녀를 상상한다. 비처럼 끊이지 않았을 순간의 연속을 이제야 상상한다.
그러나 역시 비가 온다면 비가 올 것이다. 이제는 다만 그렇게 생각한다. 각자의 말을 하고 각자의 부호를 끝으로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금 만나는 거라고 그렇게 여긴다. 마침표가 없으니 완전한 오해도 이해도 없을 테지. 발화되지 않은 마음을 끌어안는다.
그래· 여기 비 온다·
그것은 ‘엄마, 사랑해.’라는 나의 문자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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