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은빛은 아름답게 빛난다

by 윤신


내 첫사랑에게는 은빛의 이가 있었다.

가진 게 없으니 진짜 은을 덮어씌운 것은 아닐 테지만, 아마 조각난 이를 대신하기에 92.5 퍼센트의 은은 너무 무르겠지만, 내게는 나직이 제자리에서 빛나는 빛이 진짜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남겨진 빛만이 소요할 가치가 있었다. 가깝거나 먼 거리에서 뚜렷이 잔상을 남기는 은빛. 그녀가 입을 쩍 벌려 하품하거나 깔깔거리며 웃을 때마다 찬란히 빛나는 빛. 가지런히 나열된 치열사이에 끼여 그녀가 씹고 마시는 것들을 아주 오랜 시간 흘려보냈을 빛. 아주 높은 확률로 제대로 된 치과가 아니라 방바닥 이불에 누워 친한 치위생사에게 불법으로 박아 넣었을 빛. 부끄러운 줄 모르고 희고 누런 치아보다도 더 더 전신을 뽐내는 빛. 불에 타면 독 중 하나인 수은이 공기에 터져 나온다는 아말감 특유 광택이 나는 빛.


예전부터 난 차분한 고요보다 산란한 웅성임을 즐겼다. 사람들 속에서 태연히 잘 있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람이 좋았고 심신이 곧은 사람보다 미약한 사람이 더 편했다. 살짝 비뚤어지고 모서리가 조금 모나고 외로운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이라 그런 사람을 좋아한 지도, 그런 사람이니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지도 몰랐다. 어딘가 끝도 없이 환한 사람이 다가오면 설핏 뒷걸음을 쳤다. 내가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도망쳤다. 남자에게서, 그녀를 물어뜯는 남자들에게서였다. 잦은 이사와 오해, 질병처럼 파고드는 가난은 자꾸만 나를 작게 했다. 작은 나는 자꾸만 밖으로 돌았고 또래 아이들에게로 피난을 갔다. 고작 스무 살 많은 주제에 내 인생을 쥐락펴락하고 내 인생을 쥔 주제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첫사랑을 잊어버리려 온갖 애를 다 썼다. 내 첫사랑이 후회하길 바랐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지 않은 죄로 내가 이렇게 된 거야. 어설픈 복수가 되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나를 바라보길 바랐다. 단 한번이라도 질척이는 생이 아닌 나를 바라봐주길 원했다. 넌 글 쓰는 게 좋니. 중학교 2학년, 그녀가 무심히 던져준 연하늘색 노트에 가끔은 짧고 가끔은 길게 무언가를 쓰다가 어느 날인가 아니 어느 며칠인가 긴 저주를 적어 내렸다. 죽어. 죽으라고. 죽어버려. 한 페이지 가득 당신 죽으라는 얘기만 가득 써댔던 걸 당신은 알까. 결국 어린 치기가 끝나고 부끄러움에 찢어버린 몇 장의 주저를 당신을 알까.


시커먼 충치를 깎고 잘게 남은 치아에 둘러 씌운 은빛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까. 이는 더 작아져 있을까. 충치가 다시 생겼을까. 선홍의 잇몸은 무너져 내렸을까. 은빛 세계 속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열여덟인가 이가 아파 치과를 찾았다. 의사는 신경치료를 해야겠다고, 치아를 깎아 크라운을 씌워야겠다고 했고 비스듬히 누운 나는 먼저 돈 걱정을 했다. 내 첫사랑에게 아픈 것은 일을 나가지 못한다는 의미였고 나에게 아픈 것은 치료할 돈이 나간다는 의미였으니 결국 아픈 것은 돈이었다. 돈, 그놈의 돈. 그녀를 죽일 듯이 괴롭히던 돈. 저렇게 반짝이는 핀셋과 작게 빛나는 치경, 잘나 보이는 의사의 분명 잘난 시술은 큰돈이 들겠지. 도무지 그녀에게 썩어가는 이를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치통은 사춘기의 반항보다 강력했다.

엄마, 이가 아파.

치과에서 신경치료만 해 와.

결국 나는 몇 주 뒤 방바닥 이불에 누워 치아를 본떴다. 아마도 그녀가 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개인적으로 소설이든 영화든 시간을 돌리거나 이동할 수 있다는 설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간절한 만큼, 불가능이 싫다. 몇 번이나 돌아가다 결국 자신의 탯줄을 자르고 만 영화의 결말처럼 나 역시 태생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동시에 생이 미치도록 즐겁다. 더러워도 치사해도 즐거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간절하다고 썼다. 왜 간절한가,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건 언제인가를 잠시 생각한다. 도대체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야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수 있었을까. 평안과 웃음을 그녀 곁에 붙들어 맬 수 있었을까. 고3, 그녀가 재혼하길 원한다는 그 남자와 헤어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내가 노력했어야 할까. 아니 헤어질 사람은 어떻게든 헤어질 것이다. 그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아무래도 여덟 살은 힘이 없어 그녀에게 수치와 폭력만을 선물하던 아빠를 대신 때릴 수도 없을 테니 역시 열다섯 즈음일까. 그때 차라리 일기장 한가득 빼곡히 잉크로 저주를 채우기보다 말 한마디 건네는 게, 그녀의 사정을, 결코 내게 말하지 않을 그 사정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토성의 고리처럼 그녀 주위를 맴돌며 먼지와 쓰레기 같은 감정을 가득 품을 바에야 모두 먼 우주에 흩뿌리고 가벼이 유영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여전히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돌아간들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역시, 이런 유의 생각도, 시간을 돌린다는 설정 자체도 싫다. 시간의 이동은 사람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플롯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첫사랑은 예전보다 자주 웃는다. 다행이다. 원체 호탕한 성격이라 입을 쩍 벌리고 웃고, 하품도 있는 힘껏 한다. 그 사이로 설핏 은빛이 빛난다. 그 빛은 그녀가 가진 여유만큼 몸을 발한다. 웃을 때마다 은니는 원래 희어야 할 자리에서 인공적으로 빛나지만 내 첫사랑은 괘념치 않는다. 돈도 남자도 이제는 그녀의 걱정거리가 아니다. 은빛을 숨기고 은빛을 씹고 은빛을 다시 한 번 꽉 물며 그녀는 긴 시간을 버텼다. 입을 벌려 웃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게 정답이었던가, 생각한다. 무엇을 고쳐야 할지 잘 알지도 못하는 시점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게 아니라 은빛의 파안을 기다리고 기다렸어야 하는가 하고. 시간이 약이란다, 언젠가 그녀가 말한 시간을 믿고 기다리는 게 정말 약이었던가 하고.


내 첫사랑이 웃는다. 은색의 빛이 웃음으로 달궈진다. 금속성의, 사실은 색이라기보다 인공의 광택에 가까운, 그녀의 입속에서 긴 시간을 살았고 또 살아갈 은빛이 아름답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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