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땀이 밴 피부에 바람이 닿는다. 습도는 90%. 물을 머금은 공기가 선풍기 날개에 부딪혀 온 방안을 헤집는다. 볼이 붉은 아이 그림의 나무 액자, 녹차가 담긴 찻잔, 오렌지색 스테들러 샤프, 의자에 걸어 둔 셔츠, 불 꺼진 흰 스탠드, 처녀의 탑처럼 쌓인 책들, 그리고 나의 몸. 불어온 축축한 공기는 면면들에 닿고 이내 자국도 없이 사라진다. 원래 그렇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며 존재하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때로의 감정이 그것을 견디지 못할 뿐이다.
오늘은 7月, 달력의 가운데를 지난 일곱 번째 달 중에서도 10日이다. 언제 이렇게 날짜가 지났을까. 의자에 앉은 것 자체가 오랜만이다. 책상에 앉자마자 하려던 일을 제쳐두고 일력을 뜯었다. 5월 하고도 8일, 작년 겨울에 선물 받은 일력의 시간은 거기에 멈춰 나를 말갛게 쳐다봤다.
안녕.
응, 안녕.
거기는 봄과 여름의 경계겠지? 여기는 이제 여름이 시작해, 어딜 가든 분수 주위로 아이들이 뛰어놀고 사람들은 그늘을 향해 걸어가. 그나저나 오월은 보랏빛 등꽃과 수국이 한창일 텐데 참 좋겠다.
일력을 앞에 두고 재잘재잘 혼자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나는 안다. 오월에 핀 꽃들은 이미 지고 푸른 잎들만 남아 바람에 일렁이고 있을 것이다. 떨어진 꽃잎도 땅속에서 깊이 깊이 잠들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지나온 건 나뿐만이 아니다.
두 달이 넘는 날짜들을 하나씩 뜯으며 숫자 아래에 있는 글귀들을 읽었다. <모란 꽃술 깊숙이 헤집고 나오는 벌의 아쉬움이여. _바쇼>, <말이 간결한 자는 도에 가깝다. _이이>, <멀리 가는 것은 반드시 가까이에서 시작하고 높이 오르는 것은 반드시 낮은 데서 시작한다. _중용> 수십 개에 달하는 아득한 문구들이 선풍기 바람에 한 문장씩 펄럭이고 엄지와 검지 사이로 낱장의 종이가 제법 두껍게 쌓여갔다. 좋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 보니 드디어 7월 하고도 10일, 오늘이다.
<느릿느릿 백우선을 부치다가
푸른 숲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두건 벗어 석벽에 걸고 나서
이마 드러내고 솔바람을 쐬노라.
_ 이백, 여름날 산속에서>
날과 딱 맞는 초록의 글과 숫자가 눈앞에 놓이자 눈이 부시도록 환한 여름이, 일정한 각도로 몸의 일부를 흔드는 선풍기가, 차갑게 식힌 연둣빛 녹차가 실감되었다. 지금이 지금이라는 감각. 순간 두 달의 시간이 소요된 것처럼 손안이 헛헛해졌다. 그동안 뭘 했을까. 5월의 남은 달과 6월의 전일, 7월의 초입을 찢으며 그 사이 사라진 시간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정말 사라졌을까. 그러나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어떤 사건 하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그 시간을 살았다는 감각, 살고 지켰다는 감각만이 손바닥에 남았다. 문득 아마 그래서 쓰는 거라고, 나라는 사람은 시간을 잊기 위해 읽고 시간을 잡기 위해 쓴다고, 잡을 수는 없어도 그저 조금이라도 안기 위해 쓴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늘 하던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어제는 비가 몇 번이나 오다가 그치길 반복했다. 아이와 자전거 타고 나갈까 하면 천둥이 치고 집에 머물러야겠다 마음먹으면 활짝 개곤 해서 자꾸만 같은 장난을 반복하기를 좋아하는 서툰 어린아이 같은 날씨였다. 그래서 오늘도 흐린 하늘에, 잔뜩 물먹은 공기에 금방 또 비가 오려나 했더니 어느새 내내 빛투성이다. 비라는 건 모른다는 듯, 책상 옆 창문 너머에서 쟁쟁한 태양은 온 생명과 사물에 빛을 던져대고 있다.
매일 이 의자에 앉아 계절이 지나는 날씨도 보고 일력도 뜯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하루 분량의 기록을 하고 상상을 하고 정리를 하자고도 생각한다. 사는 것을 넘어 잘 사는 것에 대한 고민과 희구가 필요하다고도 여긴다. 흐음. 한동안 빠져있던 우울의 망각에서 벗어나 생생한 생을 이제 그만 살아야겠지, 생각하며 문구용 송곳을 찾는다. 두텁게 쌓인 일력을 모아 네다섯 개의 가는 구멍을 내서 실을 꿸 것이다. 작은 실제본의 공책이 만들어지면 흰 뒷면에 그날의 기록을 해나가야지. 이내 손바닥만 한 노트에는 깔끔하게 인쇄된 고문古文과 형편없게 갈겨진 내 글씨가 공존할 것이다. 과거의 문장들과 쓰이지 않은 문장들. 푸른 잉크와 공백. 그런 것들에 문득 피가 빠르게 돈다.
설레는 것이다.
물론 다짐은 그저 다짐이라는 것과 이 뜨겁고 환한 기분이 우중충해지는 건 어제 날씨의 변덕처럼 쉽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역시 몇 번이고 다시 다짐할 것이며 지친 기분이 또다시 지금의 날씨처럼 환해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괜찮다, 뭐 그런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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