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일기

by 윤신


날이 흐리다. 창 유리에 미세한 물방울이 붙는가 싶더니 와이퍼에 밀려 떨어지고 삐리릭, 와이퍼에서는 어린 새소리가 난다. 이것 봐. 비가 잘 닦이질 않아. 닦아도 허옇게 남아 있고. 이런 유막은 벗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야. 세차를 자주 해야 유리를, 안전과 직결되는 시야를 확보하는데. 아마도 '너무 귀찮아'가 생략된 그녀의 말을 들으며 세차는 차의 몸체와 눈을 함께 씻는 거구나, 생각했다. 삐리릭 다시 한번 와이퍼가 울고 나는 허옇게 남아있던 내 차의 유막을, 닦고 닦아내도 한껏 흐리던 유리창을 떠올렸다. 나의 나태가 차의 눈까지 흐리게 했나 하고.


오락가락하더니 비가 그쳤다. 아니 어쩌면 더 가는 빗방울이 왔지만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내가 보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게 전부는 아니다.


백 년이 넘은 성당에서 그녀는 '성공회'라는 이름의 뿌리를 얘기했다. 영국이라는 나라와 헨리 8세라는 인물, 그의 여성 편력과 천일의 스캔들(영화) 같은 것들.


너 혹시 헨리 8세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어?

아니.

그냥 딱 봐도 영국 아저씨야.


영국 아저씨가 설립한 성공회의 성당 안은 경건하고 약간 고집스러웠으며 정숙했다. 아직도 반들거리며 빛이 나는 주교 의자, 바깥 빛이 나무 틈 사이로 새어드는 고해성사소, 열리지 않을 풍금, 색이 바랜 주교의 옷, 청동 십자가. 일렬로 나열된 흑백 사진 속 일곱 살 정도쯤 될 남자아이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다가 문득 궁금했다. 영국 아저씨는 자신의 종교 개혁이 자기도 모르는 나라의 수많은 생에 끼어들 줄 알았을까? 하긴, 신경이나 썼을까만은.


날은 여전히 흐렸지만 비나 눈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아주 작은 날씨의 변화를 나는 지나친지도 모른다.


아끼는 공간에 갔다. 자주 가지는 못해도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뭔가가 차오르는. 우리는 그곳에서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쏟아내다 창밖의 소나무와 기와의 곡선을 훔쳐보고는 또 쏟아냈다. 가끔 사장님과도 함께. 그는 한 문장에 대해, 각자의 머릿속에서 결코 떼낼 수 없는 한 문장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의 답을 어떻게 찾게 되었는지도. 그리고 잠시 멈추다,


두 분에게도 그런 문장이 하나씩 있지 않나요?


순간 나는 공허를 떠올렸다. 뻥 뚫린 구멍. 내 안에 언제고 자리하는 시커먼 구멍. 16년의 여름날, 고등학교 선배와 한남의 작은 공원에서 서로를 마주하던 시간도 떠올랐다. 서른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흔들려도 되나. 우린 자주 머뭇거렸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나를 나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나도 말했다.

나도 이제는 내 안의 빈 공허를 인정하기로 했어.


우리는 비슷했다. 각자의 구멍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사물로 메우다 지쳤고 그래서 이제는 모두 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인정하자고, 그것이 거기에 있다면 평생 사이좋게 살아나 보자고. 그런데 그사이 사장님이 주제를 바꿨다. 제가 손님의 SNS를 보다가 느낀 게 있는대요. 바로 공허예요. 자유로운 일상 속 공허가 보이더라고요. 내 속이 다 보였나 깜짝 놀라며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졌다. 아직 티가 나나. 나의 어린 시절의 가난을 들킨 것만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게 티가 날까? 사진들에서 보일만큼이나. 그녀는 답했다. 글쎄, SNS 하는 사람 중에 공허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 애초에 공허고 외로움이고 없는 사람이 있나. 게다가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이 필수일지도 몰라. 빈 것을 채우고 드러내려는 욕망이 글로 발화되는 것일지도. 나는 다시 물었다. 언니의 한 문장은 뭐야? 그녀는 다시 답했다.


어릴 때는 내 존재가 허구가 아닐까 하고 자꾸만 의심했어. 나는 왜 존재할까, 어쩌면 나는 그저 허구인 데다 이 모든 것은 가짜가 아닐까 하고. 그런 생각이 들면 아무 의욕도 들지 않았지. 그런데 이제는 좀 달라. 허구든 아니든 지금의 나는 어쨌든 이 생을 살고 회사도 가고 밥도 먹잖아. 기어이 살고 있잖아. 진짜든 가짜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런 마음이야.


각자가 몸에 새긴 하나의 문장. 가만히 나를 물고 놓지 않는 문장. 나를 생각하고 있어? 자꾸만 얼굴을 들이밀다 등을 돌리는 문장. 그것은 결국 생生이 개개인에게 던진 수수께끼가 아닐까. 우리는 평생 그것을 풀고 이해하고 인정하고 고민하고 외면하다 다시 바라보고 화해하고 끌어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직은 겨울, 아직도 겨울.

섬에서 섬으로 돌아와 삼국시대에 지었다는 긴 성곽을 볕 좋은 봄에 걷자는 말로 우리는 헤어졌다. 해는 이미 내렸지만 아마도 비는 오지 않았고 이틀뒤면 영하 이십 도까지 내려간다는 날씨 소식이 있었다. 비가 눈으로 내릴 수도 있겠다고, 세차는 못해도 유리 세정제로 닦기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날이 흐렸지.

하지만 날이 정말 흐렸을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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