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앞에서 엉엉 울었다. 참지도 않았는데 오래 참았던 것처럼, 내내 목구멍에 어깨뼈에 갈비뼈에 울음이 맺혀 있던 것처럼, 살짝 틀어진 수도관에서 물이 쉬지 않고 떨어지는 것처럼, 상실을 모르고 상실한 사람처럼, 간신히 버티던 발끝의 힘을 모두 놓친 사람처럼, 울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처럼 한껏 얼굴을 구겨 울었다.
일월 이일의 저녁.
눈을 닦던 휴지로 코를 풀고 다시 휴지를 손에 쥐고. 그리고 생각했다. 며칠, 그러니까 발아래가 진흙밭으로 점점이 변해가던 며칠은 시간이 지나고 어떤 색과 형태로 남을까. 어쩌면 예기치 않은 불운의 배열, 무채색의 감흥, 혹은 더할 수 없는 체념의 굽은 등. 그것도 아니면 휴지에 붙은 울음을 구성하는 걱정과 피로, 미안함, 뜻대로 되지 않는 울분 같은 것.
사십오억 년을 넘게 살았다는 지구도 몸을 털고 한 바퀴 더 태양을 돌아볼까 한다는데 나는 이대로 괜찮을까. 울음. 터지고 흐르는 울음. 아니, 오히려 새해이니 이렇게 다 털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나라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입을 쩍 벌린 카오스의 혓바닥 위에서 몸을 견디고 지키고 채워 넣는 거라는 걸 인정하는 게 나을지도.
울음처럼 생각도 자꾸만 내 몸의 어딘가에서 새어 나온다.
그래도 울고 나면 후련하다. 뭐든 별게 아닌 것 같다. 계획이 틀어지든 멍청한 실수를 하든 오랜 친구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든 아이가 아프든 그게 뭐든 다 지날 것만 같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지날 것이다. 찬란한 꽃망울이 떨어지듯 진창의 흙도 언젠가는 마를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바보 같은 웃음일 것이다. 이게 뭐야, 하고 얼싸안던 두 여자의 포옹. 괜찮아 괜찮아 다독이던 서로를 향한 애쓴 다짐, 아이들이 간신히 비추어낸 속마음, 한자리에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던 수많은 눈의 응원, 그런 것들일지도.
SNS의 글에 눈이 맴돈다. 무명의 스님이 했다는 말이다. '시간이 가면 모든 게 지나간다고 하지만,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시간은 정지해 있어요.' 시간은 원래 흐르지 않는다. 순간의 팽창과 축적은 다른 리듬과 속도를 가지고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산발된 머리카락커럼 흩트려질 뿐이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의 시간은 흐르지도 찍히지도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고통의 심연에 고여있을 것이다. 멈추다 멈추다 돌처럼 굳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는 안다. 지나갈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것이 잔인할 만큼 당연하도록 지날 것이다. 일월도, 독감도, 겨울도, 꽃도, 환멸도, 애정도, 결국엔 생도.
가끔 어떤 문장이 머리에 떠오르면 한동안 그 문장에 매달린다. 십이월의 마지막날 새벽에 떠오른 것은 ‘다정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라는 문장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해 찾아보니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에 닮은 문장이 있다.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그 문장을 읽은 순간의 공감이 무의식에 새겨졌나 보다. 그래서 한참이나 지나서야 나의 말인 것처럼 나의 온전한 바람인 것처럼 스며 나왔나 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진심이다. 울음을 바쳐 그렇게 생각한다. 다정이 우리를 다정이 나를 다정이 너를 다정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울음과 웃음을 앞에 둔 모든 것들을 구원하리라.
어쩌면 이 며칠은, 혼란 그 자체이던 이 며칠은 그렇게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 안에서도 다정했다고, 쓰러지는 마음을 다잡고 다정으로, 손에 쥔 서로의 온기로 순간을 버텼다고 말이다.
새 달력의 설렘도 없이 일월의 며칠이나 지난 것에 놀랐다. 그러나 울음도 웅성임도 지났다. 울음 없는 코를 풀며 이제는 진정하고 다독여야 한다고, 지구처럼 태양처럼 익숙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걸음을 반복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다정이 나를 구하리라.
그리고 당신을 우리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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