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없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by 윤신


밤새 눈이 쌓였고 뜯어진 빵조각 같은 눈이 아침까지 내렸다. 천천히 좌우로 떠다니다 문틀에 나무에 빙글 내려앉았다. 아이는 어제 제 아빠가 포장한 선물을 뜯으며 산타 할아버지가 창문으로 들어왔다고 순순히 알았다. 그것은 정말 믿음보다 앎에 가까운 것으로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하나의 태양, 하나의 달처럼 그냥 아는 것이었다. 산타가 굴뚝도 없는 집에(있다 한들) 어떻게 들어오고 어떻게 세상 아이들의 동태를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른들의 몫이다(물론 선물도). 아이에게 산타는 그저 새하얀 눈 위에 떨어진 열매처럼 빨간 옷을 입고 루돌프를 데리고 다니며 자기처럼 착한 아이들의 머리맡에 하나씩 선물을 놓아두는 크리스마스의 현신일 뿐, 어른들이 가진 무수한 비밀 가운데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는 사실은 어른들만 알고 있다.

침대에 누운 채 환한 얼굴로 어린이용 목걸이와 반지를 요리조리 보는 아이를 보며 아, 어쩌면 종교가 이럴까 하고 생각했다. 그냥 있는 것. 그 자리에 있음을 믿을 필요도 없이 아는 것. 그러니까 종교란 믿기에 앞서 누군가의 존재를 그저 아는 것이 아닐까 하고.


쌓인 눈을 보면 아이는 밟는다. 눈 녹은 물이 고여도 밟는다. 그리고 결국은 눈 위에 드러눕는다. 옷과 신발이 젖기를 걱정하는 것은 또다시 어른이다.


눈이 바다의 수면에 닿으면 금방 녹아 사라지겠지. 물이 물을 수용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가던 길을 돌려 바다로 향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걷고 바다 옆 모노레일에 서서 점점 안으로 좁혀지다 끝내는 맺히고 만 소실점을 바라봤다. 1426년 마사초 Masaccio는 최초로 소실점, 말하자면 원근법을 회화에 적용해 <성삼위일체 Trinity >라는 그림을 그렸다. 대칭된 돌기둥과 사람들, 그 사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이미 그들의 은혜로 그림의 원근감각에 익숙했던 나는 입체적인 구도보다 묘비를 장식했다는 그 작품 아래 적힌 글에 더 사로잡혔었다.

‘나도 한때 당신과 같았고, 당신 역시 언젠가 나와 같이 될 것이다.’

부디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을.


마주한 바다는 썰물이었다. 눈이 진흙 위로, 돌의 무덤과 낮은 테트라포드 위로 내리는 모습 앞에 잠시 서 있다 바다 곁 레일 위를 걸었다. 그 위로 뻗어나간 나뭇가지를 그 사이를 머물다 날리는 눈을 눈의 춤들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켜서 영상을 찍었다. 살짝 흐린 날씨, 진흙이 흡수하는 눈, 스피커에서 낮게 흐르는 피아노 연주, 끝없이 이어진 나무와 레일, 희게 쌓인 눈, 이어지는 눈, 눈.

하늘을 보며 비를 품은 구름과 눈을 품을 구름의 색은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난 종교가 없다. 하지만 네 번째 재발한 제자리암 수술을 위해 수술대에 누웠을 때는 모든 신을 찾았다.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알라님, 그런데 공자도 신인가. 잘 모르면서 그냥 되는대로 찾았다. 누구든 당신이 누구든 조금의 힘이 있다면 저를 구해주세요. 제 체온과 면역력을 올려주세요. 자궁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앞뒤 안 맞는 기도를 했었다. 그러나 오늘에야 알았다. 신은 믿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있는 존재. 아이의 산타처럼 그 자리에 있다가 어떤 경로로든 선물을 주고 아이를 놀라게 하다 또 어딘가로 사라지고 나타나기도 하는 그런 단순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을.


어느새 겨울의 정오.

이제 눈은 그쳤다. 아마 아이와 이른 오후에는 눈으로 된 오리들을 만들 것이고 눈이 꽤 쌓였다면 작은 눈사람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젖는 몸을 나는 걱정하겠지만 아이는 또 아랑곳 않고 눈 위를 걷고 뛰고 넘어질 것이다. 그렇게 자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일도 눈이 온다면 그리고 그때가 밀물 때라면 바다에 눈이 닿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올해 나의 크리스마스의 모양이다.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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