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의 일기
연락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일에는 이골이 났지만 익숙하지는 않아서 마음이 지면에서 살짝 떨어진 채 걷고 앉고 마시다 다시 기다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기다리는 것뿐, 기다림을 끝낼 수 있는 건 나의 역할이 아니다.
두꺼운 책을 펼쳐 문자와 문자 너머에 있는 세계를 읽는다. 그곳에는 일각수가 살고 늙지 않는 소녀와 늙어버린 소년, 밤꾀꼬리가 나온다. 밤꾀꼬리.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검색하다 그 새가 우리가 흔히 아는 나이팅게일이라는 것을, 낮밤으로 울지만 다른 새가 울지 않는 조용한 밤 울음소리가 더 울려 밤꾀꼬리라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 끝, 책의 지면으로 옅은 갈색의 새가 우는 진동을 느낀다. 벌려지고 닫히는 부리와 단속적인 호흡에서 놓여난 음이 그쪽 세계의 여름 풀숲과 야트막한 수면에 부딪힌다. 다시 읽기를 이어간다. 언젠가 나는 질병처럼 책에 붙들린다고 일기에 쓴 적이 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책이 놓으면 그제야 나는 놓일 것이다. 한참을 읽다 사슴이 운다,라는 문장에서 다시 멈춘다. 사슴도 우나, 사슴도 우는구나. 사슴이 어떻게 우는지 나는 모른다. 잘 생각하면 엄마가 어떻게 우는지도 잘 모른다.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있을 텐데 잊었을지도 모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편리하게 망각하는 편이다. 엄마는 어떻게 울까. 사슴의 울음은 찾아보지 않기로 한다.
반나절 넘게 비가 왔다. 겨울인데도 비가 오는 날이 많다. 마치 나의 것은 눈만이 아니야,라고 겨울이 말하는 듯 하지만 눈은 결코 다른 계절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관계는 서럽다.
책의 한 구절처럼 비가 떨어지는 바다를 보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팔백 장에 가까운 소설을 마침내 삼일 만에 다 읽었다. 책에게서 놓여난 대신 어떤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중심부는 아니고 언저리의 것이 탈각된, 그러나 분명 나의 것이었던 것이다. 긴 소설을 읽고 나면 종종 그런 기분이 든다. 아쉽고 허무하고 조금 슬프기까지 한 그런 기분이. 소설을 다 읽을 때쯤이면 기다리던 연락이 오겠지 했는데 끝내 오지 않았다. 이미 해가 졌으니 오늘은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일도 오지 않을 것이다. 기다린다고 모든 연락이 오는 건 아니라는 걸 살면서 많이 배웠다.
Monday's child is fair of face,
Tuesday's child is full of grace,
Wednesday's child is full of woe,
Thursday's child has far to go,
Friday's child is loving and giving,
Saturday's child works hard for his living,
And the child that is born on the Sabbath day
Is bonny and blithe, and good and gay.
책의 주인공은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였다.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가득. 마더구스라는 오랜 영국 동요다. 문득 내가 태어난 해의 요일을 찾아봤다. 화요일. 그날의 날씨는 어땠을까, 그녀는 무얼 하던 중에 진통을 느꼈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허기를 느꼈다. 토마토와 레몬, 숙주를 사야겠다고, 짙푸르게 번진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었다. 기다림은 내일로 미뤄질 것이고 기다린다고 연락이 꼭 오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은 화요일이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