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의 겨울잠

by 윤신


한 음절씩 꼭꼭 씹듯이 누르는 건반 소리를 듣는다. 아침부터 희던 하늘은 여전히 희고 오늘은 눈이 올까 오면 좋겠다, 창틀에 투명하게 맺힌 유리를 본다. 창 너머 감나무 끝 주황감 몇 개가 바람에 흔들릴 때 굽이치는 소나무는 다 안다는 듯, 그게 뭐든 다 안다는 듯 가만히 나를 본다. 그게 뭐야,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도 소나무를 본다.


혼자면 좋겠다고 혼자면 뭐든 마음대로 할 거라고 혼자 강화도에 왔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을 지나 정지용 시의 제목을 따서 지었다는 카페에 도착해 안녕, 공간에 인사했다. 이곳을 처음 봤던 지난달부터 여기 와야지, 꼭 다시 와야지 몇 번이고 생각하던 곳이다. 풀과 나무가 우거진 입구 사이로 보이는 석상과 탑, 낮은 우물이 그대로다. 당연하다. 고작 한 달이다. 사십 년 전에 사장님이 직접 쌓았다던 돌담과 한껏 비틀어진 소나무, 일제 전등갓, 특유의 냄새, 반복되는 음악, 모두 그대로다. 다른 점이라고는 별채에 있는 전기난로 하나. 시월엔 없던 난로에 빨간 불이 들어와 공기를 덥힌다. 타는 소리도 냄새도 없이 벌겋게 익어 있다.


십일월, 아직 가을인데도 이곳의 공기는 고요한 겨울을 닮았다.


라테를 시켰는데 카푸치노처럼 거품 있는 게 좋아요? 없는 게 좋아요? 사장님이 묻는다. 이곳은 겨울을 닮았고 겨울은 카푸치노가 어울린다. 거품 있게 주세요. 거품이 가득한 라테를 나에게 건네기 전 사장님의 손에 시나몬 통이 들려있는 것을 본다. 그도 나를 바라본다. 역시 겨울은 시나몬이죠, 아직 겨울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사장님은 거품 한가운데에 갈빛 가루를 톡톡 두드린다. 미국엔요, 지금 이맘때면 시나몬 향이 가득 하대요. 물론 미국 같은데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지만. 사장님은 얘기하고 나는 생각한다. 겨울인가. 아직 가을이라 여겼는데 벌써 겨울인가. 카푸치노가 되어버린 라테를 받아 들고 유리창으로 우물과 나무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이곳으로 오던 길 천 마리는 되어 보이던 기러기 떼를. 커다란 원을 그리던 철새의 춤을. 차마 서지도 못하고 달리며 훔쳐보던 그들의 유영을. 섰으면 좋았을 텐데, 차를 세우고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봤어야 했는데 나는 후회했지만 이미 그 순간은 지났고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혼자라고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닐지 몰라, 당연한 걸 이제야 알게 된 사람처럼 속상해했다.


열 장짜리 단편을 써야지 하고 이곳에 왔다. 아마 안 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인데 벌써 포기할 순 없으니 쓰려는 흉내라도 낼 겸 랩탑을 켰다. 전화가 왔다. 틈틈이 거의 이십 년 넘게 사진을 찍으시는 분의 전화다. 있잖아요. 저는 사람들에게 종종 얘기합니다. 현무암보다 퇴적암을 닮은 사진을 찍고 싶다고요.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 시커멓게 구멍이 뚫린 현무암과 사암의 부드러운 결이 자연스레 머리에 떠오른다. 현무암 같은 건 화산이 확 터지면서 생겨나는 돌이잖아요. 한 번에 쏟아지면서 거칠게 구멍도 나고. 그런 돌 말고 층층이 쌓여서 자신의 무늬가 있는 돌이었으면 좋겠어요, 제 사진은. 시간이 쌓이면서 지문이 생기는 퇴적암 같은 거 말이에요. 나는 말한다. 하지만 저마다 돌의 태생과 모양처럼 각기 다른 매력이 있겠지요. 물론 그렇지요. 어떤 글이나 사진이나 결과 모양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 보다 어느 것이 자신의 취향인가 아닌가, 일 뿐이라는 것도 우리는.


지금은 밤이다. 어느새 난 하루를 묵기 위해 60년 된 흙집에 왔다. 오는 길에 기러기가 맴돌던 논을 지났지만 이제 기러기는 한 마리도 없고 커다란 곤포 사일리지만 자리에 섰다. 그 무수한 새들은 다 어디 갔을까. 이미 두 시간이 지났으니 섬 반대편에 갔어도 충분한 시간이다. 어쩌면 일찍 잠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기러기의 겨울잠. 예쁜 말이라고 생각해 종이에 적어본다.


아직 여행의 중간이다. 내일은 칠백 살이 넘은 은행나무를 보러 간다고 숙소의 주인에게 말했더니 은행잎은 진작에 다 떨어졌다고, 내년 가을에나 다시 오라고 얘기한다. 갈까 말까. 잠시 갈등하다가 아무래도 가보기로 한다. 잎은 다 떨어졌어도 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잎이 나무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의 잎은 뭘까 를,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그리고 그래도 그대로일 나를 생각한다.

뿌리를 깊게 뻗은 나목을 상상하며 세수를 하고 신발을 신고 집 앞 골목에 나갔다. 온통 밤이다. 새소리도 없이 조용한 밤. 바스락 소리가 난다 싶더니 하얗고 까만 고양이가 나를 따라 나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겨울도 아닌데 캐럴을 부르고 발아래 고양이는 바람에 구르는 마른 낙엽을 건드린다. 태어난 지 여섯 달 된 아기 고양이다. 네 인생의 첫가을과 겨울 이겠구나. 너무 깜깜해 백 미터도 채 가지 않고 고양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단편을 써야지. 아마 한 장 정도는 쓸 수 있을 지도 몰라. 돌아 오는 길 다시 캐럴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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