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누군가 쓰다만 글과 콜라주로 편집한 사진 작업을 훔쳐 읽었다.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겠다. 프레드릭 레이튼의 플레이밍 준 Flaming June이 계기였던지 그가 쓴 단어를 내가 검색했던 게 시작이었던지는. 새벽 세시에서 다섯 시. 보통은 잠깐 보다가도 덮고 말 핸드폰 화면을 까만 밤 환하게 열어두고 그의 글 모두를 읽었다. 열렬한 팬의 마음, 치졸한 질투보다 순수한 경이에 가까운 부러움이 일었다. 저 흘러넘치도록 지독한 예술성이라니.
단어와 문장이 이어가는 도로의 파편으로 속절없이 끌려가며 이 사람이 보는 세계와 나의 것은 분명히 다를 것임을. 우리 사이의 색채와 냄새, 이미지의 형태는 토성과 달의 거리만큼 다를 것임을 인정했다. 아니, 우리라고 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로 포함될 어떤 것도 없다.
훔쳐 읽었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누구든 볼 수 있는 자리에 올렸고 본인을 찾을 수 있도록 친절히 해시태그까지 썼다. 하지만 나는 훔쳐 읽었다. 훔쳐보는 행위의 망상과 상상, 은밀함과 저속함, 관능을 품고 읽었다. 헤쳐지고 벌어진 언어를 눈으로 훑고 그가 쏟은 시적인 개념을 혀로 핥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아무도 볼 수 없도록 슬쩍,
혼자만의 유희로.
그러다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써도 될까. 지적인 사고도 열망도 혁명도 그 무엇도 보일 것도 없는 내가 써도 될까. 가질 수 없는 감각과 재능은 마침내 무서워지는 법이다.
글은 19년 삼월에서 20년 십일월까지 쓰였다. 이미 사 년이나 지난 시간이다. 변하지만 결국 변하지 않는 게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니 쓰지 않았을 리 없다. 이런 류의 사람은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터지고 폭발하는 내핵을 그대로 둘리 없다. 그는 분명 쓰고, 쓰고 있고, 쓸 것이다. 사진이든 그림이든 종이든 벽이든 어디든 무언가를 채우고 쌓을 것이다. 사 년의 시간, 그는 어디에서 어떤 단어와 문장, 이미지들을 새로 지어 입었을까.
첫 문장에 나는 '누군가 쓰다 만'이라고 적었다. 순전히 내 의견이다. 어쩌면 그의 의도는 딱 거기까지인지도 모른다. 갈급은 나의 몫이고 더 읽길 원하는 건 나의 욕심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고 아름다운 걸 만들고 싶다고 썼다. 살아있는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 것이다. 이내 나는 다시 한번 몸서리치게 무서워하다 또다시 갈망한다. 미처 내칠 수도 없이 나를 휘두르고야 마는 새로운 훔쳐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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