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사라졌지만 몇 번이나 돌아가게 되는 장소가 있다. 예고 없는 회귀, 혹은 감각의 순간이동. 길을 걷는 도중이나 가만히 앉아 커피를 기다리는 와중 문득 떠오르는 수납장 맨 밑바닥의 어릴 적 옷 같이, 알 수 없어 더 매력적이던 이국의 스노볼 같이. 어떤 유의 냄새나 습도, 그러나 주로 빛이 내 손목을 끌고 그곳의 한가운데로 데려가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곳에 덩그러니 놓인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입과 같은 소리를 듣는 귀. 때로 나는 그것을 괴로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영사관에서 돌아가는 필름처럼 끊기지 않는 상황에서 고정된 몸을 비틀거나 익숙한 환호를 지를 뿐이다. 정해지 순간에 박수를 치고 야유를 보내는 숙달된 관객처럼.
나는 여덟이거나 열다섯 어쩌면 열일곱이다. 휘발된 줄 알았던 어린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불러내고 내게 묻는다. 그때 너는 왜 그랬어 그때 그는 왜 나의 몸에 손을 대었어 그때 그곳을 떠난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랐어. 사위가 흐릿해져 사물도 인물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린 나는 어른이 된 나에게 귓속말을 하고 나는 이제야 알게 된 것,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 아이에게 속삭인다.
괜찮아.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이미 다 지났어.
우리 둘은 손을 꼬옥 잡는다. 당연히도 어떤 시간들은 혼자서는 견딜 수 없다. 타인의 온기와 눈빛, 말 조각. 물처럼 그것을 삼켜야 지날 수 있는 시간. 어린 내가 나를 불러낸 이유일 것이다.
빼곡한 나무들이 말을 걸던 유년의 숲, 낡은 버스가 서던 정류장, 일렬로 줄을 선 생활의 문이 두드려지고 열리던 주공 아파트, 백문조와 가지가 살던 작은 마당, 한참을 걸어야 교문을 지날 수 있던 학교 운동장, 그 끝에 앉은 책 읽는 소녀의 동상. 습관적인 기억의 나열은 습관적으로 기억으로 돌아가는 습성을 닮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하나를 들춰본다.
어린 내 곁에 열다섯의 소녀가 있다. 한 시간 버스를 타고 가며 속을 게워내던 아이, 자신을 낮춰 사람을 웃게 하던 아이, 무지 티셔츠가 잘 어울리던 아이, 그날 우리가 벌인 일탈의 여섯 시간, 웃음과 울음이 혼재된 시간, 그날의 버스 터미널. 오래전 그날이 속절없이 내게 오면 나는 그 시절 그 아이에게 괜찮아, 괜찮아, 어리고 힘이 없는 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그런데 왜 어린아이들은 모든 어른의 실수와 무책임, 행동들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마는 걸까), 그때도 지금도 그 아이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을 그냥, 문득, 난데없이. 말하고 싶어 진다. 지난 것은 지난 것이지만. 몇 번의 회귀의 순간을 갖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테지만. 나는 그저 너의 지난 것들이 너에게 다정하면 좋겠다. 돌아갈 수많은 아름다움이 너와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다 말하고 싶어 진다. 그렇게 그렇게 어리던 그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말하고 싶어 진다.
사라진 공간,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은 장소. 무수히 많은 입구와 스위치를 가진, 그러나 마음대로 나가지는 못하는.
장소는 각각의 존재에게 영광으로 내상으로 상흔으로 얼룩으로 오래된 옷으로 남고 남은 그것을 어떻게 대할지는 나와 당신이 가진 일생의 숙제일 것이다. 아끼는 서랍장에 담긴 자잘하고 다양한, 반짝이는 잡동사니들.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드르륵. 서랍장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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