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팔아치우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모모*는 아무것도 몰라, 흘러넘치고 필요 없는 게 시간인데 모모는 빚처럼 쌓이는 시간의 고통을 모르는구나, 몰라서 좋겠구나 고개를 젖히고 웃었었지.
내 유년의 수식어는 웅크리던, 비쩍 말라붙은, 버려진 플라스틱 봉지 같은, 모자란, 넘치도록 결핍된, 비듬이 쌓인, 해진 단벌의, 손톱에 낀 때처럼 부끄러운, 견디는, 밟혀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하는, 빈, 불 꺼진 방의, 애쓰는, 아파서는 안 되는, 불필요한, 무기한 무명으로 빌린, 밀린 빨랫감의, 어색한 웃음 같은, 감추어둔 같은 것들. 어느 정도 온전하고 어느 정도 불완전한 말들.
내 안에
유년의 순간들은
불가피하게 드문드문 남아 있지만 대부분은 삭제되었어. 지운 것은 나지만 고의는 아니야. 썩은 과일의 조각을 도려내듯 덜어내듯. 저 깊은 곳의 내가, 살고 싶은 내가. 등을 돌리고 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은.
그런데 네가 인사를 한 거야. 안녕, 하고 열한 살의 나를 기억하니, 하고. 난 꼭 부끄러운 나의 유년이 들켜버린 것처럼 얼굴을 붉히다 고개를 숙였어.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나는 그때의 내가, 그때의 나를 아는 누군가가 싫은데. 다 지워버려 사실 그때는 잘 기억조차 못하는데. 하지만 너의 '왼손으로 또박또박 써주던 편지들, 네 애정 담긴 관심들이 어린 나이에도 고맙고 힘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어. 이제 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으니까. 그때의 모자람은 나의 몫이 아니니까. 그리고 네 얼굴을 보자 순간 훅, 하고 마른 소녀의 몸과 초록의 카디건이, 잇몸이 보이는 웃음이, 다정하고 편안한 사람이라고 감각한 어느 한 친구가 떠오른 거야. 그 친구일까. 맞는 것 같은데. 계단을 올라야 하던 나의 이층 집을 이야기하는 너는.
어쩌면 맞을지도, 아닐지도 몰라. 문득 지금 바라본 시계는 4:44를 가리키고.
다만 유년의 나에게서 힘을 얻은 사람이 있다는 게, 다정하게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얼마나 감사한지.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는 얼마나 강한지. 불러낼 시간이 있다는 게, 그 시간들을 팔아버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또 떠오르는 거야. 유년의 나는 우기길 좋아해서 4는 죽을 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사라고 곧잘 이야기했던 것을. 죽음 외에도 세상엔 더 많은 가짓수의 해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을. 우리는 쉽게 친해지고 쉽게 마음을 내어주고 넘어져도 아주 쉽게 일어나 무릎을 털던 것을.
짧은 인사, 안부, 웃음, 기억, 문자에도 우리는 얼마나 말캉해질 수 있는지.
고마워. 한때 버리고 싶던 나의 유년이 너로 인해 다정해졌어. 어린 내가 멋진 사람처럼 느껴졌어. 하지만 나에게 먼저 안부를 물어 온 너는 더 멋진 사람이겠지. 다정한 사람이겠지. 이러고 또 시간은 잘도 잘도 흘러가고 4:44분은 언제까지나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간일 것일테고.
*모모, 미하일 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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