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을 들었어요. 왜 새들이 비행할 때 V자 대형을 이루잖아요. 그런데 그 비행이 실은 모두 한 번에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점점의 개체가 때가 되어 나는데 날다 보니 함께였다는 거죠. 마치 고속도로에 많은 차들이 같은 도로를 가지만 모두 한 장소에서 출발한 게 아닌 것처럼 새들도 각자의 비행을 한다는 거예요. 각자의 생활을 하다가 언뜻 또 각자의 시간이 되어 길을 떠났는데 어, 너도? 하면서 만난다는 거. 재미있지 않나요? 우두머리 새가 호각을 불며 자, 나를 따르라! 해서 나머지 새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떠나는 것보다 그 편이 더 좋지 않나요? 저는 그렇더라고요. 맞아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심한 건지도 몰라요. 관계나 단체에 서툰 게 나만은 아니구나. 인간만은 아니구나. 다행으로 여겨졌어요.
저기, 썰물이 지나간 자리에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새들이 보이나요? 심해의 자잘한 물고기가 큰 형태를 이루듯 하나의 신체를 가진 바람의 춤처럼 일렁이는 저 새들. 물살을 가르듯 좌우로 몸을 틀며 공기에서 유영하는 열렬한 생명체들. 그들이 한꺼번에 날개를 구부리거나 펼칠 때 비치는 흰 빛의 더미가 보이나요. 혹, 새 등에 반사된 빛의 향연이 물 위에서 일순 개기일식처럼 침전할 때 당신도 숨을 참았나요. 눈속임이라는 듯 그윽이 그들이 하늘에 다시 오를 때서야 당신도 간신히 숨을 뱉을 수 있었나요.
멀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저 새들은 마도요일 거예요. 그냥 서 있을 때의 마도요는 알락꼬리마도요와 헷갈릴 수도 있지만 날아오를 때를 보면 알아요. 날 때 등에서 꼬리까지 흰빛을 띠는 건 마도요거든요. 갯벌에 가만히 서 있을 땐 설핏 비슷하다가도 비상을 하게 되면 전혀 다르죠. 마도요는 흰 무리, 그러니까 좀 전에 본 윤슬처럼 반짝이니까요. 시간이 괜찮다면 옆에 비치된 망원경으로 물가를 자세히 봐도 좋아요. 저는 처음 망원경으로 마도요를 봤을 때 그 탁월한 신체 구조에 감탄했어요. 다리가 길어 물 빠진 갯벌에서도 쑤욱 쑥 잘 걸어 다니고 긴 부리는 그 속의 작은 미물을 찾기에 적합하지요. 저어새는 어떻고요. 넓적한 주둥이를 얕은 물속에 넣고 휘휘 적는 그 모습이라니요. 다른 종의 새들이 한데 모여 소리를 내고 먹고 다리를 접어 쉬는 모습을 보며 나도 그 곁에 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살짝 젖은 모래에 타월을 깔고 누워 그들을 한없이 바라보는 상상을요. 바로 ‘공존’ 그 자체의 단어를요.
물때가 되어 먼 곳의 새들이 날아오르고 있어요. 곧 여기로 먹이를 먹으러 오겠지요. 마도요, 알락꼬리마도요, 청다리도요, 저어새, 백로, 갈매기. 저기 붉은 가슴 도요도 보이는 군요. 멀리서 보면 그냥 ‘새’인 것들이 가까이 들여다보고 이름을 외우면 마도요, 청다리도요처럼 개체가 되어요. 인간 내에서만 의미 있던 관계가 새로 자연으로 뻗어나가죠. 그들의 소리, 날갯짓, 꼬리깃의 색으로 그들을 알아봐요. 그렇게 되면 결코 혼자 일 수 없습니다. 혼자 살 수 없어요. 멀건 가깝건 알고 나면 결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아, 다시 마도요가 비행을 합니다. 저들이 그리는 무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의미가 있나요, 의미가 있어야만 할까요. 누구에게의 의미일까요. 자신의 시선에서 의미가 없는 것을 버티지 못하는 건 인간뿐일까요.
아마 그들은 겨울에 이곳을 떠날 거예요. 누구의 호각 소리도 없이 한데 모여 V를 이루고 다른 종의 새들이 섞이기도 해서 함께 날아가겠지요. 길을 잘 아는 새들이 앞에서 안내를 하고 맨 끝에서 유조는 바람의 저항을 덜 받기도 하며 각자의 비행을 할 거예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시간을 따라 함께하는 비행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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