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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경애해요

by 윤신



사랑받고 자랐구나,라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가만히 서서 곰곰이 조각된 시간을 바라봅니다. 작은 내가 만든 단편들이지요. 내 안에 자그마한 방을 이루고 그 안에 작은 내가 현실의 나처럼 살림을 하고 일을 해요. 대신 그 아이(내 안의 나를 이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가 신경 쓰고 바라보는 건 오로지 ‘나’라는 사람의 생태입니다. 나만을 관찰하고 외부로 통하는 모든 문, 그러니까 눈과 귀를 쉬게 하고 활짝 열게도 하지요. 무의식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나를 붙들어주기도 현실을 망각시키기도 하면서요.


두 번째 문장에서 조각된 시간이라 썼습니다. 시간을 조각한 것도 그 아이예요. 적절히 편집하고 왜곡해서 지나온 시간의 형상을 만듭니다. 벽의 한 면, 차고 있는 시계, 반바지, 투명한 안경처럼 각자의 모양과 색을 가진 기억들이 그 자리에 있어요. 사람들은 시간을 흐르는 것, 이미 고정되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시간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어요. 사건과 관계로 남아 이곳에 존재합니다. 때로는 사물이 되어 방안에 남기도 하지요. 그것을 그 아이는 소조를 하듯 뼈대를 살짝 비틀고 점토를 붙여요. 나를 좌절시키는, 웃게 하는, 편안하게 하는, 숨 막히게 하는 모든 요소를 그 아이는 알고 있어요. 무엇이 나를 살게 할지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나를 숨어들게 할지도요. 그래서예요. 다른 속도와 리듬을 가지고 유지되는 시간의 기억을 그 아이는 제 마음대로의 간격으로 분절시켜 기록합니다. 펼쳐진 배경색에서 반사판을 대고 색을 골라 무지개를 만들어요.



가족에게 단 한 번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어린 시절은요. 하지만 왜 다들 그러잖아요. 트라우마니, 유년의 기억이니 하며 그 시절이 인생을 지배한다고요.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은 저주에 가깝습니다. 나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유년의 경험이 영원이 된다니요. 사양하겠습니다. 그 아이는 재편집을 선택했어요. 망각이라는 최면과 확장이라는 이스트를 넣었죠. 술과 폭력으로 상징되던, 어린 여자를 탐하던 아버지라는 사람은 내게 없는 사람이에요. 지워버렸지요. 대신 교회 언니의 안경 하나를 부러트리고 우는 나를 달래준 상냥한 사람으로만 기억해요. 어려운 시절 서울대를 간 똑똑한 사람으로만 저장하는 거지요. 그런 식입니다. 집 나간 엄마의 부재를 동네 아주머니가 건네준 과자로, 그 작은 연민과 애정으로 채우기도 합니다. 몰래 찾아온 엄마가 사준 경양 돈가스에 딸린 수프처럼 유약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억들로요. 받지 않은 큰 사랑은 줄이고 건네받은 작은 사랑을 키우며 그 아이는 나를 채웠습니다. 타인의 인사와 눈짓, 다정한 손길로 그득그득 내 안을 쓸고 닦았어요. 너는 사랑받는 사람이야, 너는 지금으로도 충분해. 다감한 오해를 시켰습니다. 그것도 사랑이야. 차마 몰래 훔쳐보던 어린 엄마의 눈길도, 좋아한다며 남자아이가 수줍게 꺼낸 손수건에 새겨진 내 이름도, 단단히 내 손을 부여잡던 친구의 작은 손도, 타인의 스쳐 지나가는 호의나 가벼운 인사도, 그 아이는 모두 사랑이라 여깁니다. 아마 사랑이라 여겨야만 했을 테지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속 그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내 안의 그 아이를 생각해요.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그 아이들 주위에서 맴돌고 그 아이들은 바지런하게 제 몫의 일을 합니다. 각자의 나를 위해 기억을 스노우 볼처럼 흔들고 닦고 배치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는 눈이 날리고 유리구슬 속 사물들엔 얕고 흰 다정한 눈이 쌓이겠지요.

나는 그들과 흩뿌려진 흰 눈을 경애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내 안의 나를 경애합니다. 나는 나를 경애해요.


당신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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